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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기형도 시 그집 앞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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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시인님의 시 '그집 앞'에 갑니다. 29세 때 돌아가신 시인님이 생의 마지막 해에 쓴 시입니다. 쓸쓸함으로 가득한 시네요. 우리 함께 그 쓸쓸함의 빗살로 마음결을 쓸며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기형도 시 '그집 앞' 읽기

 
그집 앞

- 기형도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나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
어떤 고함 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사내들은 남은 힘 붙들고 비틀거렸네
나 못생긴 입술 가졌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벗어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1989) 중에서 


기형도 시인님(1960~1989)은 경기도 연평 출신으로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어 등단했습니다. 중앙일보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등에서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시집으로는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1989)이 있습니다.


2. 이렇게 시인을 울린 사연은 뭘까요?


기형도 시인님의 시 '그집 앞'은 출입문이 수없이 많은 커다란 집 같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에게 가깝고 편한 문을 열고 '그집 앞'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그 집 안에서 가끔 마주치기도 하겠지만 서로를 눈치채지 못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추억이 다르고 그리움이나 사랑이 다르니까요.
 
이 시의 겨울이었네, 섞여 있었네, 안심시켰네, 잊으려네, 도망치려네, 취했네, 쏟아졌네, 잃었네, 흐느꼈네, 비틀거렸네 등처럼 '~네'체의 단정한 종결어미가 우리의 손을 끌어당기네요. 그래서 이 시를 소리내어 읽어보면, 시의 모든 문장들은 시인의 발언이 아니라 마치 저마다의 독백처럼 여겨지고, 시의 진술이 바로 나의 추억인듯 공감하게 되네요.

빗방울이네는 이 구절이 우선 가슴에 와락 안겨왔습니다. 까닭없이요.

벗어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

- 기형도 시 '그집 앞' 중에서


참 쓸쓸하네요. 보통 술집에 가서 외투 같은 겉옷을 벗어두는 곳은 그 공간의 가장 구석진 곳일 것입니다. 조명도 흐릿한 구석에서 흐느끼고 있는 젊은 시인님 좀 보셔요. 다가가 손수건이라고 건네주고 싶네요.

아무리 취했다지만, 시인님을 구석에 숨어 흐느끼게 한 사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궁금해 하면서 다시 이 시의 첫머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시인님을 울린 사연은 뚜렷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시 속에 나타나지 않는데도 이렇게 쓸쓸함을 우리에게 안겨주는 힘을 가진 시네요. 이유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저마다의 사연을 그 이유에 대입하며 공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시인님은 쓸쓸함을 주제로 한 거푸집만 설핏설핏 밤하늘의 별이 보일 정도로만 지어놓았을까요?
 
나 그 술집 잊으려네 /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 기형도 시 '그집 앞' 중에서


시인은 이날 술김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것같네요. 우리도 이렇게 술김에 크고작은 실수를 하지 않습니까? 아주 종종요. 그래서 집에 돌아와 침대 안에서 불현듯 술자리의 실수가 떠올라 '이불킥'을 하면서 후회를 하지 않습니까?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 기형도 시 '그집 앞' 중에서


술자리에서 일정시간이 지나면 참으로 우리는 젖먹던 힘까지 내어, '있는 힘을 다해' 취하려고 하는 것만 같습니다. 결국 나의 힘은 술에게 다 뺐겨 술의 힘이 고함치고 멱살잡고 실언하게 되는 걸까요? 그래서 시인님과 가까이 앉았던 연인은 만취한 시인님의 실언에 충격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 겨울바람처럼 가버렸을까요?

어떤 고함 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 기형도 시 '그집 앞' 중에서


이 구절 뒤에 따르는 구절이 바로 아래의 구절입니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 기형도 시 '그집 앞' 중에서
 

기형도시그집앞중에서
기형도 시 '그집 앞' 중에서.

 

 

3. 이 시의 솟대같은 구절은?


그러니까 위의 세 구절의 인과성으로 보아 '세상에 그 같은 이 수두룩해, 그 사람 따윈 잊어버려!'라고 누군가 고함치고 조롱했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지만, 그 말이 시인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고 설득하지 못했다는 진술로 읽혀집니다. 그래서 시인님은 연거푸 두번이나 이렇게 말하고 있네요.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 기형도 시 '그집 앞' 중에서

이 구절이 시 '그집 앞'의 솟대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 쉽게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떤 이를 다른 이로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다고! 이는 그날의 시인님에게 참으로 잔인한 문장이었겠네요.

누구를 다른 누구와 대체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빗방울이네가 참으로 사랑하는 이를 누군가로 대체할 수 없듯이, 그대가 참으로 사랑하는 이를 대체할 수 없다는 점을 깊이 생각해봅니다.

이 시는 1989년 「현대시세계」 봄호에 실린 작품입니다. 그해 3월 기형도 시인님은 서울 종로의 어느 심야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습니다. 겨우 29세의 나이에 말입니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을 잃었네

- 기형도 시 '그집 앞' 중에서


술집의 '그토록 좁은 곳에서' 시인님은 사랑을 잃었다고 하는데, '그토록 좁은 곳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시인님을 잃었네요. 누구로도 대체 불가능한 저마다의 사랑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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