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로원 시 '봄날은 간다'를 만납니다. 봄이 갈 이즈음 자동으로 흘러나오는 노래입니다. 70년 전의 노랫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이 노래의 아우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네요. 그 아우라의 빛살에 마음을 씻어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손로원 시 '봄날은 간다' 읽기
봄날은 간다
- 백설희 노래,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 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의 노랫말을 쓴 손로원 작사가님(1911~1973)은 서울 출신으로 1930년대에 작사활동을 시작했으며 1949년 조국 광복의 기쁨을 노래한 '귀국선' 등을 작사하면서 작사가로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습니다. 반야월 작사가님(1917~2012)과 함께 1950~1960년대 우리 대중음악계의 양대 작사가로 활동했습니다. '봄날은 간다'를 비롯, '경상도 아가씨' '백마강' '물방아 도는 내력' '잘 있거라 부산항' '홍콩 아가씨' '님 계신 전선' '비 내리는 호남선' '불국사의 밤' 등 고향에 대한 향수와 서민의 애환이 절절히 녹아있는 수많은 히트곡의 노랫말을 썼습니다.
2. 70년 지나도록 봄날 최고 애창곡
참으로 놀랍습니다. '봄날은 간다', 이 노랫말이 1953년에 쓰인 것이라는 점이요. 지금(2023년)으로부터 70년 전이네요. 이렇게 오래된 노랫말이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중가요 노랫말'(계간 「시인세계」 조사) 1위에 꼽혔다는 점도 놀랍습니다. 여전히 이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좋아한다는 점도요.
이미자 배호 조용필 나훈아 하춘화 문주란 최헌 김정호 심수봉 김도향 이동원 장사익 한영애 ···. 이런 당대 유명 가수들이 이 노래를 자신만의 창법으로 다시 불렀다는 점도 놀랍습니다. 이 노래의 어디에 그런 '치명적 매력'이 스며 있을까요?
우선 제목부터 범상치 않네요. '봄날은 간다'. 이 다섯 글자의 울림이 큽니다.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은 생명이 약동하는 시간입니다. 그런 좋은 계절의 시간을 우리는 우리네 삶의 좋은 시간에 빗대어 '봄날'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런 좋은 봄날은 가게 마련입니다. 우리 삶의 좋은 순간도 가게 마련이네요. ‘무상(無常)’이 떠오릅니다.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 영원히 그대로 있는 것은 없다고 하네요. 제목의 함의가 주는 특별한 아우라에 우리는 속절없이 젖어듭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 손로원 시 '봄날은 간다' 중에서
봄과 연분홍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요? 치마와 봄바람은 또 얼마나요. 또 휘날림은 얼마나 더요. 이렇게 우리의 머릿속에서 색깔(연분홍)과 촉감(몸에 스치는 봄바람)과 움직임(치마의 휘날림)이 살아있는 무대는 마련되고 한 편의 연극이 막 시작됩니다.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 손로원 시 '봄날은 간다' 중에서
옷고름을 씹는다든지, 산제비라든지, 성황당 길 같은 소재는 지금의 시간과는 먼 옛날의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지금(!) 자신이 옷고름을 씹고 있는 양, 그러면서 혹시나 사랑하는 내님이 오시나 하고 산제비처럼 성황당 길을 노심초사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이런 먼 옛날의 소재들이 오히려 우리의 내면에 사물거리는 사랑의 내밀한 율동을 더욱 돋우는 역할을 하는 걸까요?
꽃이 피면 같이 웃고 / 꽃이 지면 같이 울던
- 손로원 시 '봄날은 간다' 중에서
이 대목에 이르러 우리는 그만 왈칵 울음을 쏟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든 내면에서든요. 이 노래의 최고 고음영역으로 구성된 이 구절은 꽃 필 때 같이 웃었거나 꽃이 질 때 같이 울었던 일이 없었던 사람도 대책 없이 그 동화의 주인공이 되어 아련한 그리움과 슬픔에 빠지고 맙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도대체 '나'는 몇 사람이 겹쳐져 있는 '나'일까요?
그런데요, '꽃이 지면 같이 울던'은 '알뜰한 그 맹세에'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꽃이 지면 같이 울자던'으로 해야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꽃이 지면 같이 울던 ···' 하고 화자가 말을 잇지 못하는 상황은 분위기를 얼마나 더 고조시키는지요?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 손로원 시 '봄날은 간다' 중에서
우리는 '알뜰'이라는 뜻 중에 살림이 알뜰하다는 쪽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상대방을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 참되고 지극하다'는 '알뜰한'의 다른 뜻을 간과하곤 합니다. 시 속의 두 사람은 이런 참되고 지극한 맹세를 했었군요.
이 시구에서 '알뜰한 그 맹세에'가 '봄날은 간다'와 연결되어 일어나는 뜻은 다층적입니다. '그 맹세에'에 붙은 조사 '~에'의 쓰임새 때문입니다. ‘그 맹세에 실려’ '그 맹세 바람에' '그 맹세에 매여' '그 맹세에도 불구하고' '그 맹세 속으로'···. 언젠가 만나자는 님의 맹세만 믿고 있었는데 님은 오지 않고 이 좋은 봄날은 가고 있습니다. 이 일을 어찌할까요?
그런데 오늘 빗방울이네는 이 구절의 '에'를 조사가 아닌 감탄사로 읽겠습니다. '에'의 쓰임새 중에 '속이 상할 때 혼자서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에'를 감탄사로 여겨 한번 재현해 보시지요. 깊은 한숨처럼요. ‘에~’.
알뜰한 그 맹세 / 에~ / 봄날은 간다
더 극적인 분위기에 젖을 수 있네요. 특히 시의 마지막이어서 이렇게 감탄사였을 때의 느낌이 더 애절하네요.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모호한 경계를 넘나들며 각자의 자세로 시를 즐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모호함이 시의 폭과 깊이를 더하여 우리를 저 그립고 높고 쓸쓸한 먼 곳으로 데려다주는 것일까요?
3. 노래가 묻네요, 봄날은 가는데 어쩌고 있노?
수많은 가수들이 '봄날은 간다'를 자기만의 색깔로 다시 불렀습니다. 그중에서 오늘 빗방울이네는 '이름 모를 소녀' '하얀 나비'의 김정호 가수님(1952~1985)의 버전을 들었습니다. 그의 '봄날은 간다'는 1981년 발매된 '김정호 옛 노래 모음 VOL.2'라는 레코드에 들어있습니다.
김정호 가수님의 '봄날은 간다'를 들으니, 아무도 듣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혼자서 나직이 독백처럼 부르는 톤이 좋습니다. LP판 잡음과 함께 섞인 그의 한 서린 허스키한 목소리는 다른 먼 세상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습니다. 그가 33세라는 봄날 같은 나이에 지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점도 이 노래를 더욱 애절하게 하네요. 마지막 구절이 매사 허둥거리기만 하고 있는 봄날의 저를 향해 있는 듯하네요. '봄날은 간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독서목욕'에서 봄에 대한 노래를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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