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명 시인님의 시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나'를 만납니다. 제목은 매우 냉소적인 느낌을 주지만 흥미롭고 따뜻한 시입니다. 시인님이 건네주는 꽃 같은 삶의 한 풍경 속에 우리 함께 마음을 담가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이진명 시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나' 읽기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나
- 이진명
우이동 삼각산 도선사 입구 귀퉁이
뻘건 플라스틱 동이에 몇 다발 꽃을 놓고 파는 데가 있다
산 오르려고 배낭에 도시락까지 싸 오긴 했지만
오늘은 산도 싫다
예닐곱 시간씩 잘도 걷는 나지만
종점에서 예까지 삼십분은 걸어왔으니
오늘 운동은 됐다 그만두자
산이라고 언제나 산인 것도 아니지
젠장 오늘은 산도 싫구나
산이 날 좋아한 것도 아니니
도선사나 한바퀴 돌고 그냥 내려가자
그런 심보로 도선사 한 바퀴 돌고 내려왔는데
꽃 파는 데를 막 지나쳤는데
바닥에 지질러앉아 있던 꽃 파는 아줌마는 어디 갔는데
꽃, 꽃이, 꽃이로구나
꽃이란 이름은 얼마나 꽃에 맞는 이름인가
꽃이란 이름 아니면 어떻게 꽃을 꽃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별안간 꽃이 사고 싶다
꽃을 안 사면 무엇을 산단 말인가
별안간 꽃이 사고 싶은 것, 그것이 꽃 아니겠는가
몸 돌려 꽃 파는 데로 다시 가
아줌마 아줌마 하며 꽃을 불렀다
흰 소국 노란 소국 자주 소국
흰 소국을 샀다
별 뜻은 없다
흰 소국이 지저분히 널린 집 안을 당겨줄 것 같았달까
집 안은 무슨, 지저분히 널린
엉터리 자기자신이나 좀 당기고 싶었겠지
당기긴 무슨, 맘이 맘이 아닌
이즈음의 자신이나 좀 위로코 싶었겠지, 자가 위로
잘났네, 자가 위로, 개살구에 뼉다귀
그리고 위로란 남이 해주는 게 아니냐, 어쨌든
흰색은 모든 색을 살려주는 색이라니까 살아보자고
색을 산 거 아니니까 색 갖고 힘쓰진 말자
그런데, 이 꽃 파는 데는 절 들어갈 때 사 갖고 들어가
부처님 앞에 올리라고 꽃 팔고 있는 데 아닌가
부처님 앞엔 얼씬도 안 하고 내려와서
맘 같지도 않은 맘에게 안기려고 꽃을 산다고라
웃을 일, 하긴 부처님은 항상 빙그레 웃고 계시더라
부처님, 다 보이시죠, 꽃 사는 이 미물의 속
그렇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꽃이잖아요
부처님도 예뻐서 늘 무릎 아래 놓고 계시는 그 꽃이요
헤헤, 오늘은 나한테 그 꽃을 내주었다 생각하세요
맘이 맘이 아닌 중생을 한번 쓰다듬어주었다 생각하세요
부처님, 나 주신 꽃 들고 내려갑니다.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다니, 덜 떨어진 꼭지여
비리구나 측은쿠나 비리구나 멀구나
- 이진명 시집 「세워진 사람」(창비) 중에서
이진명 시인님은 1955년 서울 출신으로 1990년 계간 「작가세계」에 '저녁을 위하여' 외 7편의 시로 등단했습니다. 첫 시집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1992년)를 비롯,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단 한 사람」 「세워진 사람」 등의 시집이 있습니다. 일연문학상, 서정시학상, 대산재단창작기금 등을 받았습니다.
2. '별안간 꽃이 사고 싶다 꽃을 안 사면 무엇을 산단 말인가'
오늘의 시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나'는 무려 47행이나 되는 긴 시입니다. 시의 화자는 운동 삼아 삼각산에 자주 가는지, 이날도 도시락까지 챙겨서 삼각산에 오르려 나섰는데 등산할 기분이 나지 않아 '도선사나 한 바퀴 돌고 그냥 내려가자' 하고, 절을 한바퀴 돕니다. 그는 이즈음 무언가 일이 잘 안 풀리는 지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기분이 꿀꿀한 그이의 눈에 절 입구 꽃 파는 데 있는 꽃이 들어왔습니다.
별안간 꽃이 사고 싶다 / 꽃을 안 사면 무엇을 산단 말인가
- 이진명 시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나' 중에서
아, 이 구절 참 멋지네요. 이 구절을 읽는 순간 바로 꽃집으로 달려가고 싶었네요. 그대는 이렇게 별안간 꽃을 사고 싶은 순간이 있었나요? 이런 순간에 꽃, 꽃을 사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얼 산단 말인가요!
별안간 꽃이 사고 싶은 것, 그것이 꽃이 아니겠는가
- 이진명 시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나' 중에서
그런데요, 시의 화자는 별안간 꽃이 사고 싶은 마음이 포르르 일어나는 것, 이게 바로 꽃이라고 하네요. 이 구절도 참 멋지네요. 정말 그런 마음은 꽃 같은 마음, 그런 시간은 꽃 같은 시간이네요. 별안간 꽃이 사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그런 좋은 사람이라면, 그런 마음만 말고 그런 마음이 일 때 정말 꽃집으로 달려가 더럭 꽃을 사는 좋은 사람이라면 좋겠습니다.
맘이 맘이 아닌 / 이즈음의 자신이나 좀 위로코 싶었겠지
- 이진명 시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나' 중에서
와우, 시의 화자는 이렇게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꽃을 샀다고 합니다. 기분이 꿀꿀했던 자신을 달래기 위해서 말입니다. 내가 나의 감성을 챙겨주는 행위, 그렇게 푸릇푸릇 살아난 감성이 또 나를 챙겨줄 것 같네요. 이 빗방울이네는 이렇게 제 자신을 위해 꽃을 사본 적은 없습니다. 그대는 있겠지요?
3. 우리가 꽃을 사는 이유는 뭘까요?
그런데요, "꽃을 산다고? 꽃 사지 말고 그냥 맛있는 거나 사와. 쓸데없는 데 돈 쓰지 말고." 이러는 분들 많습니다. "꽃을 사준다고? 아, 아니, 그, 그러지 말고 그냥 돈, 돈으로 줘." 이런 분들도 있습니다. 거참.
우리가 꽃을 사는 이유는 무얼까요?
이 시에 나타난 '꽃을 사는 이유'를 꼽아보면, '맘 같지도 않은 맘에게 안기려고', 그러니까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꽃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상대방을 위해 꽃을 샀다면, 꽃을 받는 상대방이 기뻐할 순간을 생각하기만 해도 그이보다 먼저 내 마음이 흐뭇하군요. 이렇게 꽃은 타자의 마음이든 나의 마음이든, 꿀꿀해진 마음에 주는 선물이군요. 오롯이 마음에 주는 약이군요. 영혼을 위로해 주는 다정한 이가 바로 꽃이군요.
부처님도 예뻐서 늘 무릎 앞에 놓고 계시는 그 꽃이요
- 이진명 시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나' 중에서
그리고 위의 구절처럼 꽃이 '예뻐서' 가까이한다고 하네요. 무릎 앞에 늘 예쁜 꽃이 있어서 부처님도 더 든든히 높아 보이고 그 공간도 더 향기로웠군요.
이렇게 우리가 꽃을 사는 이유는 우리의 일상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영역에 '꽃의 언어'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가 전하고 싶은 어떤 마음이 꽃의 언어로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 꽃을 사야겠네요. 나를 위해서든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든요. 어서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꽃을 소재로 한 시 한 편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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