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자매 노래 '실버들'을 만납니다. 늦봄이면 자동으로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입니다. 이 노랫말 속에는 참으로 낭만적인 장면이 들어있습니다. 우리 함께 이 시의 자양분에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희자매 노래 '실버들' 읽기
실버들
- 희자매 노래, 김소월 시, 안치행 작곡
실버들을 천만사 늘여놓고도
가는 봄을 잡지도 못한단 말인가
이내몸이 아무리 아쉽다기로
돌아서는 님이야 어이 잡으리
한갓되이 실버들 바람에 늙고
이내몸은 시름에 혼자 여위네
가을바람에 풀벌레 슬피 울 때에
외로운 맘에 그대도 잠 못 이루리
노래 '실버들'은 3인조 여성그룹 '희자매(Hee Sisters)'가 1978년 발표한 1집 앨범 타이틀곡입니다. '희자매'는 김재희 김인순(인순이) 이영숙 등 세 사람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나중에 솔로로 독립해 국민가수가 된 인순이의 공식 데뷔 앨범이 바로 '희자매' 1집 앨범이었던 것입니다. '실버들'은 TBC '인기가요 베스트 7'에서 7주간 1위를 했던 그 해 최고의 히트곡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노래입니다.
2. 몸부림도 이런 몸부림이 있을까요?
'실버들' 노랫말의 절창은 바로 첫 구절인 듯합니다. 몸부림도 이런 몸부림이 또 있을까요?
실버들을 천만사 늘여놓고도 / 가는 봄을 잡지도 못한단 말인가
- 희자매 노래 '실버들' 중에서
실버들은 가느다란 가지가 아래로 길게 늘어진 수양버들을 말합니다. 마치 문에 치는 커튼처럼 보입니다. 이런 실버들의 기다란 가지를 세상의 봄 풍경 속에 천만사(千萬絲), 수없이 많이 늘여놓고도 어찌 가는 봄을 잡지를 못한단 말인가 하고 한탄합니다. 이 구절 때문에, 이 가사가 떠올려 주는 장면 때문에 이 노래는 우리네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실버들이 축 늘어진 모습과 함께 말입니다. 그래서 실버들이 가지가지에 봄물이 가득 차는 늦봄에, 저만치 여름이 오는 것이 보일 즈음 이 노래는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서 자동 재생되나 봅니다.
이내몸이 아무리 아쉽다기로 / 돌아서는 님이야 어이 잡으리
- 희자매 노래 '실버들' 중에서
자연의 섭리겠지요. 실버들을 천만사나 늘여뜨려 가는 봄을 잡으려 해도 못 잡는 것처럼, 나를 떠나는 님을 잡지 못하는 것도 자연의 이치겠지요. 이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달래었으니 시의 화자는 마음이 편해졌을까요?
한갓되이 실버들 바람에 늙고 / 이내몸은 시름에 혼자 여위네
가을바람에 풀벌레 슬피 울 때에 / 외로운 맘에 그대도 잠 못 이루리
- 희자매 노래 '실버들' 중에서
아닌 것 같습니다. 여전히 시의 화자는 떠난 님을 잊지 못해 마음이 아픈 상태이네요. 실버들은 바람에 늙어가고 자신은 시름에 여위어간다고 합니다. 시의 화자는 한 술 더 떠서, 오는 가을에 풀벌레가 우는 외로운 밤이 되면, 그대도 내가 생각나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네요. '희자매'의 노래에서 이 구절이 끝난 뒤 색소폰 연주가 길게 이어지는데요, 노랫말 화자의 몸부림 같기도 한 가락이 참 애절하네요.
3. 김소월 전집에는 ‘실버들’이 없다
이 애절한 노랫말이 김소월의 시로 표시되어 있습니다만, 이를 입증할 자료가 아직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 노래가 나온 1978년 이후에 출판된 김소월 전집에 이 시 '실버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1995년 집문당이 펴낸 「원본김소월전집」(오하근 편저)과 1996년 서울대학교 출판부가 발행한 「김소월전집」(김용직 편저)에도 없네요. '실버들'이 김소월의 시라면, 김소월의 시를 모두 집대성한 이 두꺼운 두 가지 전집에 실려 있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가요로 만들어진 김소월의 시 '개여울',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못 잊어' '먼 후일' '부모'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등은 모두 앞의 두 김소월 시전집에 나옵니다. '희자매'의 노랫말이 된 '실버들'이 김소월의 시인지는 연구가 더 필요한 상황입니다.
조선시대 우의정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의 시조 '녹양이 천만사인들'을 읽습니다. 이원익은 1597년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죽이려고 했을 때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선 인물입니다. 그의 충정으로 이순신 장군은 목숨을 건지고 백의종군하게 됩니다. 그의 시조를 잠시 감상합니다.
녹양(綠楊)이 천만사(千萬絲)인들 가는 춘풍(春風) 잡아 매며
탐화봉접(探花蜂蝶)인들 지는 꽃을 어이하리
아무리 사랑(思郞)이 중(重)한들 가는 님을 잡으랴
- 「교주 병와가곡집」(김용찬 저, 월인) 중에서(*고어는 현대어로 변경)
위 책의 「병와가곡집」은 조선 정조 때 편찬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녹양(綠楊)'은 푸른 버들입니다. '탐화봉접(探花蜂蝶)'은 꽃을 탐하는 벌과 나비입니다. 그러니까 '푸른 버들이 천만가닥이라 해도 가는 봄바람을 어떻게 잡으며, 꽃을 탐하는 벌과 나비라 해도 지는 꽃을 어떻게 붙잡느냐'라고 한탄하네요. 역시 마지막에는 '아무리 사랑이 깊다고 해도 나를 버리고 돌아선 님을 어떻게 잡을 수 있겠느냐'라고 탄식합니다. 만난 자는 반드시 헤어지게 되어 있다는 '회자정리(會者定離)'가 떠오릅니다. 삶의 무상함이네요.
노랫말이 된 시 '실버들'과 비슷한 분위기의 시조 '녹양이 천만사인들'. 이 두 가락 모두 참으로 사람 애간장 다 녹이네요. 아무리 실버들을 길게 늘어뜨려 놓아도 봄과 봄바람을 잡지 못한다는 기발하고 낭만적인 착상은 우리를 저 높은 곳으로 데려가 주네요. 어떻게 이런 멋진 상상을 하게 되었을까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봄노래를 더 음미해 보세요.
'읽고 쓰고 스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르페 디엠 죽은 시인의 사회 호라티우스 시 읽기 (77) | 2023.05.16 |
---|---|
봄날은 간다 손로원 시 읽기 (64) | 2023.05.13 |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알프레드 디 수자 시 (52) | 2023.05.10 |
이진명 시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나 읽기 (71) | 2023.05.09 |
브레히트 시 나의 어머니 읽기 (65) | 2023.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