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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백석 시 미명계

by 빗방울이네 2024.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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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인님의 시 '미명계'를 만납니다. 어둑새벽에 일어나 시장 언저리를 아주 천천히 걸어보고 싶어지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미명계' 읽기

 
미명계(未明界)
 
-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자즌닭이 울어서 술국을 끓이는 듯한 추탕(鰍湯)집의 부엌은 뜨수할 것같이 불이 뿌연히 밝다
 
초롱이 히근하니 물지게꾼이 우물로 가며
별 사이에 바라보는 그믐달은 눈물이 어리었다
 
행길에는 선장 대여가는 장꾼들의 종이등(燈)에 나귀눈이 빛났다
어데서 서러웁게 목탁(木鐸)을 뚜드리는 집이 있다
 

- 「정본 백석 시집」(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07년 1쇄, 2019년 32쇄) 중에서 

 

2. '자즌닭이 울어서 술국을 끓이는 듯한'

 
백석 시인님의 시 '미명계'는 1936년 발간된 시집 「사슴」에 실린 시입니다. 시인님 25세 때네요. 25세 청년 백석 시인님의 눈으로 본 '미명계'는 어떤 풍경일까요?
 
'未明界'. 아직 밝지 않은 세상입니다. 국어사전에 보니 '미명(未明)'의 유의어로 '어둑새벽'이 있네요. '어둑새벽'이라는 말, 참 좋습니다. '꼭두새벽', '이슬아침'도 있네요.  
 
이 미명계의 시간은 어둠과 밝음의 경계입니다. 날이 새려고 빛이 희미하게 도는 '희붐한 세계'입니다. '희붐하다'는 말도 참 좋네요. 
 
때는 1936년, 장소는 시인님의 고향 정주일까요? 시의 무대는 시골 장터 언저리입니다. 지금(2024년)으로부터 90여 년 전, 희붐한 어둑새벽, 시골 장터 언저리에서는 어떤 일이 펼쳐지고 있을까요?
 
자즌닭이 울어서 술국을 끓이는 듯한 추탕(鰍湯)집의 부엌은 뜨수할 것같이 불이 뿌연히 밝다

- 백석 시 '미명계' 중에서

 
첫구절이 재밌네요. 새벽에 닭이 자주 울어서 술국을 끓인다는 구절요. 술국을 끓이게 된 동기가 닭이 자주 울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달콤한 새벽잠에 빠져있는데 '꼬끼오~' 소리가 들립니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다 닭을 키웠는데, 이 닭의 중요 임무의 하나는 새벽을 알리는 것입니다. '자연의 알람'입니다.

요즘 스마트폰에 알람설정을 해두듯 닭에게 '기상 알람'을 맡겼네요. 닭의 울음소리에 잠을 깨는 일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지요. 얼마나 자연과 한 덩이가 되는 일인지요.
 
닭은 동이 트기 전부터 웁니다. 이렇게 시끄러운데도 안 일어난다고? 또 웁니다. 집주인에게 어서 일어나라고 채근하듯이요. 그래서 새벽에 자주 우는 닭, 자즌닭입니다. 
 
그래서 '자즌닭이 울어서 술국을 끓이는 듯한'은 시인님의 다정한 익살이 가득 들어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 깨워줘서 고맙다. 꼬꼬야, 오늘도 잘해보자. 기지개를 켜면서 수건을 머리에 고깔처럼 쓰고 부엌으로 나오는 추어탕집 여주인의 모습이 생생히 보이네요.
 
술국은 요즘의 해장국인데, 술국이라는 우리말이 더 정답습니다. 부들부들한 시레기 넉넉히 들어간 뜨뜻한 추어탕 한 그릇이면 간밤의 술기가 확 풀리겠네요.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에 '부엌은 뜨수할 것 같이 불이 뿌연히 밝다'라고 하네요. '뜨수할 것 같이'. 이 구절은 참 사랑스럽습니다. 희붐한 어둑새벽에, 모두 불이 꺼져 있는 시골의 새벽 장터에 불이 뿌연히 밝은 집이 있네요. 그것도 부엌 불이 말입니다.
 
그 불빛은 누군가를 위해 따뜻한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는 신호, 삶이 깨어있다는 신호입니다. 멀리서라도 그 불빛을 만나면 허기진 새벽의 우리는 얼마나 안심인지요. 마음이 급해지고 몸도 달아서 어서 거기로 뛰어들고 싶네요. '뜨수할 것 같이'는 이 시를 숨 쉬게 하는 '심장'이네요.
 
초롱이 히근하니 물지게꾼이 우물로 가며 / 별사이에 바라보는 그믐달은 눈물이 어리었다

- 백석 시 '미명계' 중에서

 
'초롱'은 물통입니다. 국어사전을 보니 '석유나 물 따위의 액체를 담는 데에 쓰는, 양철로 만든 통'입니다. 청사초롱 같은 등(燈)도 초롱인데요, 다음 4행에 '종이등(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행의 초롱은 물통으로 새깁니다.
 
물지게꾼은 물을 지고 집집마다 다니며 파는 물장수입니다. 빈 양철 물통(초롱) 두 개를 기다란 막대기 양끝에 매달고 어깨에 졌겠지요? 그렇게 우물로 가고 있는 양철 물통이 희근하다고 합니다. '히근하니'는 '희부연하니', '희미하니'로 새깁니다.
 
그런데요, '초롱이 히근하니 물지게꾼이 우물로 가며'라고 했으니, 미명의 어둠 속에서 시인님의 눈에 먼저 보인 것이 사람(물지게꾼)이 아니라 희미하게 드러나는 양철 물통(초롱)이라는 말입니다. 그걸 보면 물지게꾼이 우물로 간다는 것을 금방 연상할 수 있다는 말이네요.
 
'초롱이 히근하니'와 1행의 '자즌닭이 울어서'를 나란히 놓고 봅니다. 둘 다 사물(자즌닭, 초롱)이 사람을 불러오는 오브제가 됩니다. 사물과 사람은 이렇게 딱 붙어 있네요. 닭도 초롱도 사람도 그 공간에 공존하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믐달'. 그믐 전 며칠 동안 해뜨기 직전 꼭두새벽에 동쪽 하늘에 뜨는 달입니다. 그믐은 음력으로 그달의 마지막 날이고요. 그러니 그믐달은 완전히 사위어가는 달입니다.
 
'그믐달은 눈물이 어리었다'. 이 '눈물'의 마음은 누구의 것일까요? 시에 나타난 인과관계로 보면 '물지게꾼이 ~ 별사이로 바라보는 그믐달은 눈물이 어리었다'입니다. 그러니 '눈물'은 물지게꾼의 마음이네요.
 
과연 그럴까요?
 
물장수가 바라본 그믐달에 눈물이 어리었다는 것을 어두운 새벽에 타인이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그렇습니다. 그건 먼저 시인님의 마음입니다.

우물로 가다 문득 새벽하늘을 올려다 보던 물장수의 시선을 따라 시인님의 시선도 함께 움직였네요. 거기 그믐달이 있습니다. 미명계의 처연한 그믐달을 보면서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슬픔이 부풀었을까요. 저리 사위어가리라. 시인님의 서러운 마음, 그런 눈에 굴절된 그믐달이 파르르 떨리고 있네요. 

그리하여 같은 그믐달을 바라본 물지게꾼의 마음도 그랬겠습니다.

"뜨수할것같이"-백석시'미명계'중에서.
"뜨수할 것같이" -백석 시 '미명계' 중에서.

 

3. '종이등에 나귀눈이 빛났다'

 
행길에는 선장 대여가는 장꾼들의 종이등(燈)에 나귀눈이 빛났다

- 백석 시 '미명계' 중에서


'행길'은 '한길'의 방언으로 차나 사람이 많이 다니는 큰길입니다. '선장'은 '이른 장' 또는 '이른 새벽에 서는 장'으로, '종이등(燈)'은 촛불 같은 불빛을 넣은 통을 한지로 감싸 만든 초롱으로 새깁니다. '대여가는'은 '대어가는'으로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가는'이라는 의미고요.
 
추탕집 앞 한길에는 장꾼들이 나귀를 앞세우고 '선장'으로 가고 있네요. '대여가는'의 의미로 보아 걸음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그렇게 서두르는 장꾼들의 표정은 없고 그냥 '나귀눈이 빛났다'고 하네요. 아직 어둠이 깔려있는 희붐한 새벽에 종이등을 밝히고 길을 서둘러 가는데요, 그 불빛에 반사되어 크고 둥그런 나귀눈이 빛났다고 합니다. 이 장면, 정말 보석 같은 장면이네요.
 
서둘러 가는 장꾼들의 마음은 바쁩니다. 남들보다 먼저 가야 시장의 좋은 자리를 차지할 테니까요. 그런 장꾼들의 표정이 바로 나귀눈을 통해 나타났네요. 나귀는 짐을 등에 진 데다 발걸음도 재촉당하니 종이등에 비친 그 눈빛이 형형할 수밖에요.

그런 나귀 눈빛을 보니 장꾼 표정은 안 봐도 다 보이네요. 어둑새벽에 이렇게 사물들은 흐릿하게 섞여 구분과 차별이 없는 세상이네요.
 
어데서 서러웁게 목탁(木鐸)을 뚜드리는 집이 있다

- 백석 시 '미명계' 중에서

 
목탁소리는 언제 들어도 서러운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벗겨달라는 기도입니다. 그 목탁소리가 미명계의 삶들을 경건하게 감싸주며 멀리멀리 퍼져가고 있네요.
 
이렇게 시인님은 평화로웠던 우리네 공동체의 미명계를 정밀하게 복원해두었네요. 그래서 우리는 이 시 속의 어둑새벽을 걸으면서 기도할 수 있게 되었네요. 우리의 삶도 이 따뜻한 공동체의 삶이기를요. 생명인 것과 생명 아닌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모두 자연 속에서 어우러져 언제나 편안하기를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백석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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