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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곽재구 시 사평역에서

by 빗방울이네 2024.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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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시인님의 시 '사평역에서'를 만납니다. 톱밥난로에 한 줌의 톱밥을 던져주고 싶어지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곽재구 시 '사평역에서' 읽기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1954년 ~ , 광주)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곽재구 시집 「사평역에서」(창작과비평사, 1983년) 중에서

 
곽재구 시인님은 1954년 광주광역시 출신으로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등단했습니다. 시집 「사평역에서」 「정장포 아리랑」 「한국의 여인들」 「서울 세노야」 「참 맑은 물살」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와온 바다」 등이 있습니다.
산문집으로는 「곽재구의 포구기행」 「곽재구의 신포구기행」 「곽재구의 예술기행」 「우리가 사랑한 1초들」 「길귀신의 노래」 「시간의 뺨에 떨어진 눈물」 등이, 시선집 「별밭에서 지상의 시를 읽다」 등이, 동화집 「아기 참새 찌꾸」 「낙타풀의 사랑」 등이 있습니다.
신동엽창작기금, 동서문학상, 대한민국예술문화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 시인님의 시 '사평역에서'는 시인님의 데뷔작입니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품입니다. 시인님 28세 때네요. 
 
시인님이 발갛게 지펴놓은 톱밥난롯가로 함께 갑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 곽재구 시 '사평역에서' 중에서

 
막차란 매번 왜 늦는 것일까요? 마지막 기차를 놓치면 큰일입니다. 집으로 가는 막차를 타기 위해 서두르는 사람들, 앞정거장마다 그들을 조금씩 기다려주었을까요? 기차가 들어와야 할 선로 쪽으로 고개를 빼고 보아도 기차 머리는 보이지 않고 깜깜한 어둠뿐입니다.
 
대합실 유리창마다 수수꽃 같은 눈보라가 들러붙은 겨울밤이네요. 그 대합실에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추운 시간 속에서 고단하고 쓸쓸한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
 
아, 거기에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라고 합니다. 발갛게 달아오른 톱밥난로가 시린 유리창마다 비치고 있네요. 저마다의 시린 가슴마다 지펴지고 있네요. 얼마나 다행인지요? 톱밥난로, 한번 보고 싶은 궁금한 난로인데, 그러나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따뜻한지요?
 
그믐처럼 몇은 졸고 /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곽재구 시 '사평역에서' 중에서

 
함께 막차를 기다리는 우리는 어쩐지 잘 아는 사이인 것만 같습니다. 타인이지만, 같은 막차를 기다리는 우리는 서로의 형편을 다 알고 지내는 친한 사이인 것만 같습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지요. 막차를 기다리는 사이니까요, 고단한 삶의 정거장에 가까스로 도착해서 집으로 가는 사이니까요. 이런 사이는 말하지 않아도 속내를 다 아는 가까운 이웃 같달까요?   
 
하루의 노동에 지쳐 졸음 속으로 그믐달처럼 사그라드는 사람들이, 아픈 사람들이 톱밥난롯가에서 온기를 쬐고 있습니다. 이들을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는 일이었네요. 얼마나 따뜻한지요. 톱밥 한 줌에 사위어가던 불빛이 확 살아나며 그이의 얼굴이 환하게 붉어지는 것이 보이는 것만 같은 구절이네요.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 모두들 아무 말고 하지 않았다

- 곽재구 시 '사평역에서' 중에서

 
'청색의 손바닥'. 이 시에서 가장 아픈 시어네요. 추위에 차갑게 얼어버린 손일까요? 그렇게 언 손바닥을 톱밥난로 쪽으로 내밀어놓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우리는 다 알 수 있지 않은지요? 서로 고단한 시간이라는 것을요. 다만 침묵 속에서 저마다의 내면을 응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마다 살아낸 하루, 나에게로 온 이런저런 상처들을 불빛에 말리고 있을 뿐입니다.
 

'톱밥난로'-곽재구시'사평역에서'중에서.
"톱밥난로" - 곽재구 시 '사평역에서' 중에서.

 

 

3.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 모두들 알고 있었다

- 곽재구 시 '사평역에서' 중에서

 
막차를 타야 하는 사람들의 하루는 얼마나 길었던지요? 살아내기 위해 지난 하루 열두 번도 더 가면을 벗었다 쓰기를 반복했습니다. 가슴 가득 차오른 서러움은 그대로 눌러두어야 하겠지요?
 
- 걱정 마세요, 어머니. 저는 아무 일 없이 잘 지내고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새로워진 우리는 정다운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내색 못할 아픔을 따뜻한 가족의 보따리로 싸매고 갑니다. 그 보따리를 풀면 서러움이 왈칵 쏟아지겠네요.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 그래 지금은 모두들 /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 곽재구 시 '사평역에서' 중에서

 
아픈 사연이 있는 이라도 눈꽃 앞에서는 얼마나 환해지는지요. '싸륵싸륵' 쌓이는 눈꽃은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마저 덮어주네요. 목화솜이불처럼 쓰담쓰담 감싸주네요.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시는 동안만이라도 우리는 저마다의 아픔을 잊을 수 있겠습니다. 
 
자정 넘으면 /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곽재구 시 '사평역에서' 중에서

 
기다리던 막차를 탔을까요? 어두운 창밖으로는 설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저렇게 다 덮여버리지 않던가요? 어떠한 '낯설음과 뼈아픔도' 말입니다. 그걸 잘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애면글면 삶을 홀로 견뎌야 하는 것이 우리의 슬픈 운명이네요.
 
시의 화자는 울고 있을까요? 눈물에 굴절된 차창의 불빛이 단풍잎 같았을까요? 우리는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어느 정거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다음 내릴 그곳은 부디 희망의 시간이기를, 부디 따뜻함의 시간이기를!
 
지금은 고단한 시간, 우리가 할 일은 이 세상의 톱밥난로에 한 줌의 톱밥을 던져주는 일, 이 생을 이루는 질료에 한 줌의 눈물 같은 사랑을 던져주는 일이겠습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박용래 시인님의 시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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