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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박인환 시 세월이 가면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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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 시인님의 시 '세월이 가면'을 만납니다. 박인희 가수님이 노래로 불러 국민 애창곡이 된 시입니다. 시인님이 구축해 놓은 서늘한 그리움 속으로 들어가 함께 마음을 씻고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박인환 시 '세월이 가면' 읽기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 「박인환 전집」(맹문재 엮음, 실천문학사) 중에서

 
박인환 시인님(1926~1956)은 강원도 인제 출신으로 21세 때인 1946년 국제신보에 시 '거리'를 발표하며 등단했습니다. 동인지 「신시론」,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했습니다. '후반기' 동인을 결성해 활동했고, '영화평론가협회'를 발족했습니다. 1955년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이 된 「선시집」을 발간했고, 이듬해 1956년 심장마비로 31세의 짧은 일기로 타계했습니다. 20주기인 1976년 시집 「목마와 숙녀」, 26주기인 1986년 시집 「세월이 가면」이 출간됐습니다. 시인님의 고향인 강원도 인제군청과 내린문학회, 시전문지 「시현실」 공동 주관으로 박인환문학상이 제정·운영되고 있습니다.
 

2. 감각이 기억한 것은 잊히지 않는다

 
박인환 시인님의 시 '세월이 가면', 참으로 애틋하지요? 우리가 잘 아는 박인희 가수님이 부른 가요 '세월이 가면'의 가사가 된 시입니다. 
'세월이 가면'이라는 제목 뒤에 생략된 '무엇'이 시 본문에 등장할 것 같네요.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 그의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어

- 박인환 시 '세월이 가면' 중에서

 
그랬네요. 세월이 가면 잊힐 줄 알았는데 잊히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머리(지성)로 기억했던 이름은 잊혀도 감각이 기억한 것, 그 눈동자와 입술은 가슴에 있다고 하네요. 이 도입부가 시를 저 높은 곳으로 올려놓는 솟대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고 / 비가 올 때도 / 나는 저 유리창 밖 /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 박인환 시 '세월이 가면' 중에서

 
가로등 아래(가로등 바로 아래는 어두워요.)에서 특별한 추억이 있었네요. 내 가슴에 있다는 '눈동자 입술'은 가로등 아래의 그것이었을까요?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잊지 못한다네요.
 
사랑은 가고 / 과거는 남는 것 / 여름날의 호숫가 / 가을의 공원

- 박인환 시 '세월이 가면' 중에서

 
어쩌면 우리는 날마다 과거를 사는 것 같습니다. 오늘을 산다고 하면서요. 우리는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과거의 그 사랑이 생각납니다. 호숫가와 공원만 보아도 그곳에서 함께 했던 과거의 그 사랑이 생각납니다. 이렇게 '사랑'이 있었기에, 그 사랑을 그리워하는 힘으로 오늘을 사는 거네요. 아, 사랑의 힘이네요. 
 
나뭇잎에 묻혀서 /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그의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 박인환 시 '세월이 가면' 중에서

 
맨 마지막 '서늘한 가슴'은 얼마나 서늘한지요? 사랑이 빠져나간 자리에 애잔한 그리움의 조각들이 뒹굴고 있네요. 이렇게 그의 가슴은 폐허가 되었지만 그래도 '눈동자 입술'이 남아있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영원히 식지 않을, 서늘한 그리움이네요.
 

박인환시세월이가면중에서
박인환 시 '세월이 가면' 중에서.

 

 

 

3. 시인의 묘비명이 된 시

 
이 시는 1956년 이른 봄에 씐 것입니다. 서울 명동의 한 주점에서 박인환 시인님이 즉흥적으로 쓴 시라고 합니다. '세월이 가면'은 발표 직후 시인님의 친구인 이진섭 작곡가님이 곡을 붙였고, 임만섭 성악가님이 불러 대중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 박인희 가수님이 부른 '세월이 가면'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의 애창곡이 되었습니다.
 
이 시를 쓰고 1주일 후 박인환 시인님은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이 시는 비극적 시대를 살아온 시인님 생애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온 시였네요.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 후의 혼란의 소용돌이를 지나고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쓰인 슬프고 애절한 사랑의 노래였네요. 현실의 고통이 컸었기에 시인님의 그리움이 더 절절하게 다가오네요.
 
시인님이 사망(1956. 3. 20)한 해의 추석 때 시인님의 망우리 묘소에 묘비가 세워졌습니다. 그 묘비에 새겨진 문장이 바로 '세월이 가면' 첫 구절입니다. 명조체로 흘려 쓴 묘비명은 이렇습니다.
 

詩人朴寅煥之墓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 그의 詩 <세월이 가면>에서 -

 
「박인환 전집」(맹문재 엮음, 실천문학사)의 앞쪽에 실린 사진을 보니, 그의 묘비 앞엔 시인이 좋아했다는 위스키와 꽃다발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린 세 자녀들이 묘비를 가운데 두고 서 있네요.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으로요. 시인은 가고 이렇게 그의 '눈동자 입술'을 닮은 아이들이 세상에 남았네요. 얼마나 보고 싶겠는지요? 서로요.
 
세화야, 아빠는 네가 보고 싶다. 참으로 귀여운 세화야. 아빠는 네 곁에 있어야 할 것인데, 가족이 무엇인지 나보다도 우리 가족을 위해 지금 너와 떨어져 있단다 ··· 아빠는 네가 몹시 아프다는 말을 듣고 손에 아무 맥이 없다. 그리고, 눈물이 난단다. 너, 내 사랑하는 딸 세화야, 빨리 나아라 ··· 세형이하고 잘 놀아라. 빨리 내가 집에 들 것이니 우리 함께 즐겁게 만나자.

- 어린 딸에게 보낸 박인환 시인님의 편지 중에서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그리움에 대한 시 한 편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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