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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서정주 시 자화상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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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시인님의 시 '자화상'을 읽습니다. 60여 년 동안 1,000편에 이르는 시를 썼던 시인님의 출사표 같은 시입니다. 시인님이 건네주는 시의 자양분으로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서정주 시 '자화상' 읽기


자화상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우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숫개마냥 헐떡어리며 나는 왔다.


- 「미당 서정주 전집 1 시」(은행나무, 2015) 중에서 

 
미당 서정주 시인님(1915~2000)은 1915년 전북 고창 출신으로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등단했습니다. 1941년 첫 시집 「화사집」을 비롯, 「귀촉도」 「서정주 시선」 「신라초」 「동천」 「질마재 신화」 「떠돌이의 시」 「서으로 가는 달처럼···」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안 잊히는 일들」 「노래」 「팔할이 바람」 「산시」 「늙은 떠돌이의 시」 「80소년 떠돌이의 시」 등 15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2.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얼마 전, 빗방울이네 블로그 '독서목욕'을 아껴주시는 이웃님이 책을 보내주셨습니다. 「서정주 문학앨범」. 이 책에는 시인님의 연대기와 작가 사진 앨범, 작품론, 작가 본인의 문학론, 자선 대표시 등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웃님은 자기는 이미 이 책을 읽었으니 빗방울이네가 읽고 나서 시를 좋아하는 많은 이들과 함께 그 감상을 나누면 좋겠다 하시네요. 한동안 책꽂이에 올려두었던 그 책을 읽고, 도서관에서 시인님의 시집도 빌렸습니다.

시인님의 시 가운데 '자화상'을 택했습니다. 1941년의 첫 시집  「화사집」에는 모두 24편의 시가 실렸는데, 그 중 '자화상'이 가장 첫머리에 등장합니다. 시집의 서문 대신 쓴 서시(序詩) 같은 시네요. 그만큼 시인님이 이 시를 소중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걸어온 길, 나아갈 길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서정주 시인님이 23세 때 이 시를 썼네요. 1937년이니 당시는 일제강점기입니다. 이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청년 서정주는 어떤 말을 우리에게 건네고 있을까요?

애비는 종이었다

- 서정주 시 '자화상' 중에서

 
참으로 저돌적인 첫 행입니다. 이리 송곳처럼 찌르려 드는 첫 행은 달리 없을 것만 같네요. 이렇게 솔직한 고백에 당황한 나머지 우리는 이 시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됩니다. 

'애비가 종이었다'는 화자의 고백에 우리가 놀라는 가운데 '식민지 치하에서의 굴욕적인 삶이란 바로 일본인의 종살이 아니었겠는가?'라는 문장이 오버랩되면서 이 시구는 한층 강하게 진동하는 것 같습니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 서정주 시 '자화상' 중에서

 
아무 바람벽 없이 부는 바람 그대로 맞고, 내리는 비에 속수무책 젖고, 천둥소리 가까이 들으며 허허벌판에서 컸다는 말이네요. 화자는 절망하고 주저앉았을까요? 그런 참혹한 현실의 고통에 맞서며 이렇게 왔다고 합니다.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 병든 숫개마냥 헐떡어리며 나는 왔다

- 서정주 시 '자화상' 중에서

 
시대의 시련은 화자를 굴복시키지 못한 것 같네요. 참다운 시를 쓰겠다는 의지, 시의 길을 가며 던지는 출사표 같은 구절이네요.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 이마 우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 서정주 시 '자화상' 중에서

서정주 시 '자화상' 중에서
서정주 시 '자화상' 중에서.

 

 

3. 시인이 삶에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것은?

 
서정주 시인님은 등단 후 60여 년 간 1,000편의 시를 썼다고 합니다. '병든 숫개마냥 헐떡어리며' 암울한 시절을 건너면서, 삶의 비의를 담은 그 수많은 시를 쓰면서 시인님은 어떤 '비밀'을 알아냈을까요? 
 
네. 알아낸 비밀이 있습니다. 빗방울이네 블로그 이웃님이 보내주신 책 「서정주 문학앨범」에요. '내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깨달았던 것'이라면서 79세 때 서정주 시인님이 직접 밝힌 내용입니다. 
 
세상의 더러움에 아직 조금도 물들지 않은 어린이들의 그 천사성(天使性)이니,
이것이 사람이 당연히 가져야 할 본모양으로 안다.
이것이 세상의 좋지 않은 습관들에 절어 송두리째 메말라 버리지 않도록 늘 마음을 써야겠으니,
여기에서 절실히 필요한 것은 큰 종교들이 가르쳐 온 계율(戒律)들의 이행이다. 
(중략)
'나쁜 버릇이 아직 들지 않은 어린이들은 두루 천사 그대로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79세의 이 나이에 마음에 묻은 때들을 말끔히 씻어
어린이천사시절에의 환원(還元)을 이루어 보려 하는 것이다.

- 「서정주 문학앨범」(웅진출판, 1993)의 '내 인생공부와 문학표현의 공부' 중에서


바로 '아이 마음을 갖는 것'이네요. 우리가 일전에 읽었던 동학 경전의 한 구절과 많이 닮았네요. '사람을 대할 때 언제나 어린아이 같이 하라.' 그리고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구도 생각나네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이렇게 진리는 서로 통하고 있었군요. 
 
빗방울이네에게 「서정주 문학앨범」을 보내주신 이웃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포스팅이 좀 늦어졌지만, 덕분에 '삶의 비의를 파고든 1,000편의 시를 쓴 이가 전해주는 삶의 비기'를 이렇게 많은 이웃님들과 공유하게 되어 행복한 아침입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삶의 비의를 알려주는 시 한 편을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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