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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문태준 시 맨발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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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님의 시 '맨발'을 만납니다. 산문시인데 그 긴 결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 한편이 찡해지는 시입니다. 문득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이 시를 읽으며 마음을 씻으며 독서목욕을 해봅시다.
 

1. 문태준 시 '맨발' 읽기

 
맨발
 
-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 문태준 시집 「맨발」(창비) 중에서

 
1970년 경북 김천에서 출생한 문태준 시인님은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했습니다.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등이 있고,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미당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애지문학상,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문득 아버지가 보고 싶어지는 시

 
이 시에 나오는 개조개는 시중에서 대합이라고도 불리는데 크기가 큰 조개입니다. 속살이 조개 밖으로 삐죽이 삐져나오는 조개입니다. 그 속살을 건드리면, 조개는 천천히 그것을 안으로 거두어들입니다. 
 
개조개의 이같은 생태적인 특성을 마주친 순간, '맞아, 이건 시야' 하면서 무릎을 탁 쳤을 문태준 시인님이 떠오르네요. 시가 싹튼 순간입니다. 곧이어 문태준 시인님은 그 개조개를 통해 탁발을 나서는 부처님과 한 집안의 가장을 떠올렸나 봅니다. 개조개의 의인화를 통해 전체적으로 슬픔의 기조 속에 삶의 고단함, 가족의 소중함을 불러일으키는 시입니다.
 
이 시 '맨발'을 읽을 때마다 아버지가 떠오릅니다. 아주 어렸을 때 기억입니다. 설핏 머리맡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새벽잠을 깹니다. 아버지가 새벽 출근을 위해 식사를 하고 계십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드시지만, 참기름 냄새 나는 고소한 계란 비빔밥의 향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는 하루 동안 힘든 일을 하셔야 할 아버지를 위해 아끼는 계란과 아끼는 참기름을 밥에 비벼 든든한 계란밥을 해드렸네요.   
 
아이는 잠을 깼지만, 고소한 냄새에 배가 고프지만 모른 척 계속 눈을 감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아이의 기척을 다 알고 계셨겠지요? 아버지는 아이의 흐트러진 이불을 바로 덮어주시곤 방문을 열고 나가십니다. 매서운 겨울 바람이 안방으로 훅 들어옵니다. 아이는 잘 모르지만 아버지는 아직 캄캄한 새벽의 먼 길을 걸어 읍내에 가서 버스를 타고 시내의 직장으로 가실 참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세계는 아이에게 멀고도 경이로운 것이었지만 한편으로 깊이모를 슬픔과 아픔의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문태준시맨발중에서
문태준 시 '맨발' 중에서

 

 

3. 험한 세상 헤쳐가는 맨발 맨손의 아버지들

 
언젠가 거실에서 가족이 모여 영화를 보고 있었습니다. 영화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데, 아버지의 고달픔이 화면 밖으로 진하게 퍼져나오는 슬픈 장면에서였습니다. 험한 세상에 맨손 맨발인 채로 고단한 삶을 사시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워 울컥 고개를 위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눈이 충혈된 아이가 가만히 자신의 고개를 어깨에 기대어왔습니다. 그 뜨거운 영화 장면 앞에서 각자의 아버지를 떠올린 것이네요.
 
그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 아버지야. 아버지의 눈빛을 보는 아이가 힘을 낼 수 있도록 이불을 덮어주고 아무렇지 않은 듯 새벽 공기를 가르며 씩씩하게 먼 길을 갔다 와야 하는 아버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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