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시인님의 시 '빈집'에 들어갑니다. 이 아프고 슬픈 시는 우리를 어떤 시간으로 데려가줄까요? 아픔과 슬픔은 어떻게 우리를 씻어줄까요? 함께 읽으며 마음 씻으며 독서목욕을 해보십시다.
1. 기형도 시 '빈집' 읽기
빈집
-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 지성사) 중에서
경기도 연평 출생인 기형도 시인님(1960~1989)은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중앙일보 기자(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등)로 활동했습니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어 등단한 이후 개성 강한 시들을 발표했으나 1989년에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1989년)은 우울한 유년시절과 부조리한 체험의 기억들을 따뜻한 공간 속에 펼쳐 보였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2. '빈집'이 되어버린 슬픈 청춘
오늘 오후에 미술관을 지나가는데 미술관 벽에 커다란 펼침막이 걸려있었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젊은 시각 새로운 시선 2023 - 슬픈 나의 젊은 날'
슬픈 나의 젊은 날! 화창한 봄날 오후 벽에 묶여 펄럭이던 그 펼침막을 보는 순간, 기형도 시인님의 시 '빈집'이 떠올랐습니다. 기형도 시인님은 안타깝고 아까운 청춘의 나이(29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이렇게 슬프고 아프고 뜨거운 시들을 잔뜩 써두고 말입니다.
이 시에 나오는 '빈집'은 무얼까요? 어떤 실체적 공간을 말할까요? '빈집'은 '시인의 몸'이 아닐까요?
시의 화자는 이별의 고통 속에 휩싸여 있습니다. 이별 전후의 내면 풍경은 참으로 다릅니다. 그만큼 치열했기에 짧았던 밤들, 앞이 안 보이게 주위를 감싸던 겨울안개들, 기도를 몰라주던 촛불들, 유언이라도 쓰게 될지 모르는 흰 종이들, 사랑하는 이의 먼발치에서 흘리던 눈물들, 오로지 나의 것이던 열망들에게 이제 안녕을 고합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이가 없는 세상은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내 가까이 머물던 것들에게 아무 관심이 없어진 나의 몸은 그렇게 텅 비고 말았습니다. 빈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어찌 '내 사랑'조차 사라질까요? 내 사랑은 결코 지울 수 없는 것이네요. 내 사랑은 그렇게 텅 빈집에 남게 되었네요. 사랑하는 이의 실체는 떠나고 없으니 빈집에 갇힌 내 사랑은 가엾은 사랑이 되고 말았네요.
어쩌자고 기형도 시인님은 20대 후반에 이렇게 슬픈 시로 우리네 아픈 청춘의 시간들을 호명하는지요. 빗방울이네도 그 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거대한 벽에 억눌린 일상들, 사랑하는 이와의 영원한 이별과 헐벗은 시간들, 미래에 대한 막막함들, 함께 있어도 혼자이던 쓸쓸함과 무기력의 기억들이 꾸물거리며 나오는 것만 같습니다. 미술관 벽에 걸린 펼침막처럼, 기형도 시인님의 시처럼 '슬픈 나의 젊은 날', 돌이키는 것만으로도 아프고 힘이 드는군요. 고요히 재워두는 수밖에요.
3. 힘들었지만 소중한 내 청춘
그런데 문득 배우 이성민 님의 인터뷰가 떠올랐습니다. 최근 '대외비'라는 영화 개봉에 즈음해 YTN과 인터뷰하는 그를 우연히 TV로 보았는데, 그때 그의 어떤 말에 빗방울이네는 울컥 눈물을 쏟을 뻔했습니다.
배우가 되겠다는 열망 하나로, 이성민 배우님은 10년 동안 대구에서 연극배우 생활을 하며 홍보 전단지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커피 프림 죽으로 배고픔을 달래며 20대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요, 이성민 배우님은 그렇게 힘들었던 자신의 20대가 가장 행복했다고,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요.
많이 순수했던 시절, 춥고 배고픈 거 말고는 걱정이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 너무 행복했던 거 같아요. 그때가 가장 저한테 전성기. 그 시절이 없었다면, 그런 치열할 시절이 없었다면 현재도 없었을 것이고요.
- 이성민 배우의 YTN 인터뷰 중에서
이런 말을 정말 처음 들어봅니다. 춥고 배고팠던 청춘시절이 행복했다! 이 문장이 가슴을 훅 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조심스럽게, 삶의 지층을 살며시 들추어 그 갈피 속에 재워두었던 아픈 청춘을 만나봅니다. 거기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웅크리고 있네요. 흔들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네요. 가만히 다가가 안아주어야겠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모른 체 혼자 두지 않겠다고, 네가 있어 지금 내가 있을 수 있다고, 고맙다고, 이제 함께 가자고 해야겠습니다. 이렇게 기형도 시인님의 슬픈 '빈집'이 우리의 슬픈 청춘을 어루만져주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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