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시인님의 시 '귀뚜라미'를 만납니다. 안치환 가수님의 노래 '귀뚜라미'의 가사가 된 시입니다. 귀뚜르르, 시인님이 들려주는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마음을 씻으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나희덕 시 ‘귀뚜라미’ 읽기
귀뚜라미
- 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 나희덕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비, 1994년 1쇄·2019년 25쇄)중에서
나희덕 시인님은 1966년 충남 논산 출신으로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했습니다.
1991년 첫 시집 「뿌리에게」를 낸 것을 비롯,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파일명 서정시」 등을 냈습니다.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등이, 산문집 「반통의 물」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저 불빛들을 기억해」 등이 있습니다.
김수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아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다'
나희덕 시인님은 1994년에 낸 두 번째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를 내면서 이렇게 후기에 적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사라졌다고 믿어버리는 시대에,
그 썰물 앞에 시인이 끝내 디디고 서야 할 개펄은 얼마나 넓은 것인가.
거기 우묵하게 발 담그고 있으면, 어느새 물결이,
새로운 물결이 밀려와 내 존재를 압도해 올 그런 날이 혹 있을까.
- 나희덕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창비) 중에서
지금(2023년)부터 30년 전의 글이네요. 그 당시 시인님이 '새로운 물결'을 기다리며 '개펄'에 서서 쓴 시, 함께 읽어보시죠.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 나희덕 시 '귀뚜라미' 중에서
귀뚜라미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은 시끄러운 매미소리에 묻혀 있다고요. 사람들에게는 목소리 큰 매미소리만 들리고 자기 울음은 들리지 않는다고요. 불현듯 이 구절에서 우리는 저마다 서러운 사연으로 귀뚜라미가 되고 마는군요.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 나희덕 시 '귀뚜라미' 중에서
이 귀뚜라미가 사는 곳은 차가운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입니다. 얼마나 삭막한 곳인지, 풀잎도 없고요, 이슬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곳이네요. 그대가 있는 곳은 어떤가요?
우리 그러나 살아있어요! 차가운 바닥에 토하는 울음으로, 숨막힐 듯이요. 사람들아, 높은 가지의 매미들아, 우리 여기 숨막힐 듯 살아있어요!
3.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 나희덕 시 '귀뚜라미' 중에서
우리의 작은 목소리가 사람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까요? 저 시끄러운 매미소리를 뚫고 한 사람에게라도 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타전할 거예요. 사람들아, 높은 가지 말고 지하도 콘크리크벽에도 생명이 있어요! 우리 노래를 들어주세요!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 계단을 타고 이 땅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 나희덕 시 '귀뚜라미' 중에서
매미는 매미시절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아무리 목청이 커도, 아무리 높은 가지를 차지하고 있어도요. 여름이 지나면 그 소리는 걷히게 되어 있네요.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니까요. 그리니 맑은 가을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귀뚜라미는 그 가을을 기다리고 있네요. 가을은 이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까지 올 수 있겠지요. 맑으니까요. 맑은 것은 맑은 것 사이로 스밀 수 있어요.
맑은 가을이 오는 날, 지금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를 적실 수 있겠지요? 매미소리를 따라갔던 그 가슴들을 울릴 수 있겠지요? 아, 어서 맑은 가을이 왔으면요!
귀뚜르르르 귀뚜르르르 귀뚜르르르 뚜르르
안치환 가수님이 이 시를 가사로 1995년 발표한 가요 '귀뚜라미'를 듣는 밤입니다. 그대도 이토록 마음이 아린지요? 이 세상 낮고 외진 곳에서 맑은 가을을 위해 절차탁마하고 있는 모든 이들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강은교 시인님의 시 '사랑법'을 만나 보세요.
'읽고 쓰고 스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읽기 (79) | 2023.08.27 |
---|---|
함형수 시 해바래기의 비명 읽기 (85) | 2023.08.25 |
문태준 시 처서 읽기 (89) | 2023.08.23 |
박용래 시 강아지풀 읽기 (96) | 2023.08.22 |
강은교 시 저물녘의 노래 읽기 (82) | 2023.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