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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함형수 시 해바래기의 비명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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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형수 시인님의 시 '해바래기의 비명'을 만납니다. 이 시 속에 스며있는 시간을 따라가며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함형수 시 '해바래기의 비명(碑銘)' 읽기


해바래기의 비명(碑銘)
 
- 함형수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래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래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래기는 늘 태양(太陽)같이 태양(太陽)같이 하던 화려(華麗)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눌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어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청년 화가 L을 위하야
 
- 한국현대시문학대계 「함형수 이한직 외」(김광림 책임편집, 지식산업사, 1986년) 중에서

 
함형수 시인님(1914~1946)은 함북 경성(鏡城) 출신으로 1936년 서정주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 님 등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들었고 그 창간호에 '해바래기의 비명(碑銘)' 등을 발표했습니다. 193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마음'이 당선되었습니다. 해방 후 북한에서 살았으며 정신착란증세로 고통받다 30세의 일기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2. '러시아 미남' 함형수 시인님의 대표작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 함형수 시 ‘해바래기의 비명(碑銘)’ 중에서


이 시는 시인님 22세 때 쓰였습니다. 그러니 이 첫구절에 나오는 당부는 황혼에 이른 시인님이 아니라 20대 초반 청년의 당부이네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함경북도에서 온 시인님은 1935년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 전신)에 입학합니다. 그러나 가난으로 학교를 그만두게 됩니다. 그 당시 시인님은 어떻게 사셨을까요?

함형수 시인님과 당대에 활동했던 이봉구 소설가님(1916~1983)은 1930년대 명동 일대 문인들의 교류기를 실명 소설로 남겼습니다. 거기 나오는 함형수 시인님의 당시 근황입니다.

다니던 학교(*중앙불교전문학교)도 내팽개치고
하숙에서 상밥집으로 완전히 ‘데카단’이 되어
거리를 방황하여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떠들고
밤이면 ‘쓰리’ 노름꾼 절도 사기꾼들이 모여들어
초조한 얼굴로 앉아 있는 상밥집 구석방으로 기어 들어가 잠을 자고
새벽이면 뛰어나와 바로 이웃인 오군(*오장환 시인님)의 집 대문을 두드리며 서성거렸다.

- 이봉구 소설 '속(續) 도정(道程)'(「문예」, 1949년) 중에서(*는 빗방울이네 주석)


당시 실화를 기록한 이 소설에서, 친구들 사이에 불리는 함형수 시인님 별명은 ‘러시아의 미남’입니다. 키도 크고 이국적인 외모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으로 인해 학교도 그만두고 상밥집(식당) 구석방에 몸을 의탁한 비참한 신세입니다.
 
이즈음 발표된 시가 '해바래기의 비명(碑銘)'이네요.
 
함형수 시인님은 1936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그만두고 거기서 만난 서정주 시인님, 김동리 소설가님 등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듭니다. 그 첫 호에 '해바래기의 비명을 실었던 겁니다. 
 
그랬던 함형수 시인님이 어느날 명동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형수와 가장 가까이 지내던
성범이나 정주나 오 군이나
형수의 이야기가 나오면 시인부락첫 호에 실린
그의 시를 먼저 끄집어낼 정도로
아름다운 시인의 한 사람이었다.

- 이봉구 소설 '속(續) 도정(道程)'(「문예」, 1949년) 중에서

 
이성범 서정주 오장환 시인님들은 사라진 친구를 그리며 그의 시 ‘해바래기의 비명(碑銘)’을 읊조렸다고 하네요.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래기를 심어 달라

- 함형수 시 ‘해바래기의 비명(碑銘)’ 중에서

 
참으로 애절한 구절입니다. 무덤 속 자신을 딛고 자란 해바라기이니 그 해바라기는 바로 그 자신일 것입니다. 죽어서 노오란 해바라기로 태어나고 싶다는 말이네요. 가난도 억압도 모르는 해바라기로 말입니다. 
 
이 시의 질료가 된 시간은 1936년 즈음입니다. 일제강점기였고, 중일전쟁 발발(1937년) 직전입니다. 이미 일본 관동군은 1931년 만주를 침입해 만주국을 세웠습니다. 이 땅의 청년들은 어떤 상황이었을까요? 가난과 억압, 징용에 쫓기면서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불안과 고통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우리들 앞엔
서러운 정신의 숙명이 다가오기 시작한다는 예감에서
(*'해바래기의 비명(碑銘)'이) 더욱 가슴을 적시는 듯한 생명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 이봉구 소설 '속(續) 도정(道程)'(「문예」, 1949년) 중에서(*는 빗방울이네 주석)

 
이렇게 친구들의 가슴을 적셔주었던 시 '해바래기의 비명(碑銘)'을 마저 읽습니다.
 
그리고 해바래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래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눌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어오르는 나이 꿈이라고 생각하라

- 함형수 시 '해바래기의 비명(碑銘)' 중에서

 
가난하고 불안했던 시절, '노오란 해바래기'로 피어나 끝없는 보리밭을 보며 자연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고 싶었고, '하눌을 쏘는 노고지리'가 되고 싶었던 문청들은 이 시를 읊조리며 내일을 꿈꾸었네요. 얼마나 애달픈지요.
 
전쟁이 절정에 이르면서 일본의 징용이 심해지자 명동의 문청들은 비상이 걸렸습니다.
 
장환은 징용을 피하여 먼저 광산으로 가버리고
광균은 고무회사에서 나와 놀다가 하는 수 없이 정회(町會) 사무원으로 들어갔고
신백수는 초라한 모습으로 집에서 술만 마시다가 견디다 못해 시골군청의 고원으로 들어갔으되
국민문학이니 황도문학이니 하는 매족 친일문사패와는 거리를 멀리하였고
정주와 그의 벗인 김동리는 산골에 숨어 새로운 세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징용이니 보국단이니 이것을 피하기 위하여 
또 일본경찰의 잔악한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너나없이 직업을 가져야 했고
직업 중에서도 징용을 면할 수 있는 직업을 구해야 된다는 데 더욱 큰 괴로움이 있었다.

- 이봉구 소설 '속(續) 도정(道程)'(「문예」, 1949년) 중에서
 

함형수시해바래기의비명중에서
함형수 시 '해바래기의 비명' 중에서.


 

3. 시대의 아픔이 흔들어놓은 삶 삶 삶 ···

 
함형수 시인님은 명동을 떠나 막노동도 하고 숙박소 등을 전전하다가 만주로 건너갑니다. 당시 만주는 일본의 괴뢰정부 체제였지만 내선일체를 강요하는 국내보다는 사정이 나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지식인들에게 그때의 만주는 숨통이었던 셈이네요. 
 
만주에서 시인님은 훈도(교원) 시험에 합격해 교원으로 근무합니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도 아름다운 연인과 잠깐이나마 행복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인님의 삶은 이렇게 불운하게 끝나네요. 이를 어찌할까요?
 
이 무렵 만주에 순회공연차 온 여배우와 동거생활을 하였으나
그녀가 도망쳐버리자 해방 직후 정신이상이 생겨
30세의 일기로 북한에서 죽었다.

- 한국현대시문학대계 「함형수 이한직 외」(김광림 책임편집, 지식산업사, 1986년) 중에서

 
시 ‘해바래기의 비명(碑銘)’에서 '비명(碑銘)'은 시인님이 울부짖는 비명(悲鳴) 같기도 하고, 제명대로 다 살지 못하고 비명(非命)에 가신 시인님의 슬픈 생애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시대의 아픔은 그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삶을 이렇게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네요.
 
시인님은 해바라기가 되어 오늘의 우리를 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시인님은 노고지리가 되어 높은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은 밤입니다. 그대 안녕하신가? 하면서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시대의 아픔 속에서 살다 간 김규동 시인님의 시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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