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 시인님의 시 ‘처서’를 읽습니다. 시인님이 보여주는 그리운 풍경 속으로 들어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과 조우하며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문태준 시 '처서' 읽기
처서(處暑)
- 문태준
얻어온 개가 울타리 아래 땅그늘을 파댔다
짐승이 집에 맞지 않는다 싶어 낮에 다른 집에 주었다
볕에 널어두었던 고추를 걷고 양철로 덮었는데
밤이 되니 이슬이 졌다 방충망으로는 여치와 풀벌레가
딱 붙어서 문설주처럼 꿈적대지 않는다
가을이 오는가, 삽짝까지 심어둔 옥수숫대에 그림자가 깊다
갈색으로 말라가는 옥수수수염을 타고 들어간 바람이
이빨을 꼭 깨물고 빠져나온다
가을이 오는가, 감나무는 감을 달고 이파리 까칠하다
나무에게도 제 몸 빚어 자식을 낳는 일 그런 성싶다
지게가 집 쪽으로 받쳐 있으면 집을 떠메고 간다기에
달 점점 차가워지는 밤 지게를 산 쪽으로 받친다
이름은 모르나 귀 익은 산새소리 알은체 별처럼 시끄럽다
- 문태준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창작과비평사, 2000년) 중에서
문태준 시인님은 1970년 경북 김천 출신으로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했습니다. 2000년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을 낸 데 이어 시집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아침은 생각한다」 등을 냈습니다. 산문집으로 「느림보 마음」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지요」 등이 있습니다.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소월시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애지문학상,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우리나라 대표 서정시인의 등단작 ‘처서’
오늘 만나는 시 ‘처서’는 문태준 시인님의 등단 작품입니다.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당선작입니다.
24 절기의 하나인 ‘처서(處暑)’는 더위가 그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네요. ‘곳’을 나타내는 ‘處’는 휴식한다, 머무르다, 멈춘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暑’는 더위를 말하고요. 그러니 처서는 그동안 맹위를 떨치던 더위가 멈추는 시간이라는 뜻이네요.
우리나라 대표 서정 시인으로 꼽히는 문태준 시인님은 시 ‘처서’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무엇을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시인님이 자신의 현재 또는 과거의 일상에서 포착한 미세한 장면들, 우리는 지나치기 쉬운 희미한 것들을 집어 우리에게 가만히 보여주고만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가만히 마음의 옷을 벗고 그 장면 속으로 들어가 독서목욕을 하면 되겠네요.
얻어온 개가 울타리 아래 땅그늘을 파댔다
짐승이 집에 맞지 않는다 싶어 낮에 다른 집에 주었다
- 문태준 시 ‘처서’ 중에서
시의 화자는 현재 마음이 어수선한 상태인 듯합니다. 짐승도, 남의 집에 그 짐승을 준 시의 화자도 마음이 어수선합니다. 지금 나는 잘 살고 있는 건가? 처서가 되니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게 되는 걸까요?
볕에 널어두었던 고추를 걷고 양철로 덮었는데
밤이 되니 이슬이 졌다 방충망으로는 여치와 풀벌레가
딱 붙어서 문설주처럼 꿈적대지 않는다
- 문태준 시 ‘처서’ 중에서
빨갛게 빛나던 고추는 수분이 다 빠져 쭈글쭈글해지며 생기를 잃었네요. 풀벌레도 생명이 다하는 시간입니다. 처서가 오면 모기입이 비뚤어진다고 합니다. 선선한 기운에 모기도 힘을 잃게 된다는 말이네요. 그렇게 기세등등 자라던 풀도 더 자라지 않아 벌초를 하는 시기입니다.
‘이슬이 졌다’는 구절이 눈길을 잡네요. ‘지다’는 여러 뜻을 지닌 동사입니다. 이 때는 자연현상이 생기는 것을 말하네요. 가뭄이 지다, 장마가 지다, 썰물이 지다, 살얼음이 지다, 땅거미가 지다. ‘꽃이 지다’와 ‘이슬이 지다’를 번갈아 생각하며, 생성과 소멸을 한 번에 담고 있는 우리말의 오묘한 맛을 느껴봅니다.
가을이 오는가, 삽짝까지 심어둔 옥수숫대에 그림자가 깊다
갈색으로 말라가는 옥수수수염을 타고 들어간 바람이
이빨을 꼭 깨물고 빠져나온다
- 문태준 시 ‘처서’ 중에서
‘삽짝’, 참 오랜만에 만나는 정겨운 단어네요. 잡목의 가지를 엮어서 만든 문짝이 달린 대문입니다. ‘삽짝’, 이 단어를 곱씹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삽짝을 밀면 강아지가 그 작은 꼬리로 저를 치며 달려올 것만 같네요.
3. ‘바람이 이빨을 꼭 깨물고 빠져나온다’
옥수수수염을 타고 들어간 바람이 이빨을 꼭 깨물고 빠져나온다
- 문태준 시 ‘처서’ 중에서
이 구절을 다시 읽습니다. 마법 같네요. 어떻게 우리는 여기서 옥수수 알처럼 꼭 깨문 바람의 이빨을 떠올릴 수 있는 건가요? 이때의 바람은 옥수수를 영글게 하는 임무를 다하고 빠져나오는 바람일까요? 이 선선해진 바람결에 옥수수향을 느끼게 되는 건 대체 어찌 된 일일까요?
가을이 오는가, 감나무는 감을 달고 이파리 까칠하다
나무에게도 제 몸 빚어 자식을 낳는 일 그런 성싶다
- 문태준 시 ‘처서’ 중에서
참 다정하지요? 나무에게 이런 마음을 갖는 이라면 그이는 바로 그 순간에 감나무가 된 사람이겠네요. 감나무와 하나 되지 않으면, 감나무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애틋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지요?
지게가 집 쪽으로 받쳐 있으면 집을 떠메고 간다기에
달 점점 차가워지는 밤 지게를 산 쪽으로 받친다
- 문태준 시 ‘처서’ 중에서
기운이 선선해지면서 생각이 많아지는 시간이네요. 그동안 밖으로 향해 있던 시선이 내부로 향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달이 점점 차가워지면서 자기와 주위를 돌아보게되는 시간, 처서입니다.
이름은 모르나 귀 익은 산새소리 알은체 별처럼 시끄럽다
- 문태준 시 ‘처서’ 중에서
이 구절에서 우리는 자연과 소통하고 지내는 시인님의 고요한 일상을 느낍니다. 산새소리가 요란한데 그것이 마치 자신을 알아보고 반갑다고 소리치는 것만 같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시인님이 산새소리를 반가이 여긴다는 말이어서 다정한 시인님의 성정을 느끼게 해 주네요.
자신을 반갑다고 하는 그 산새소리가 ‘별처럼 시끄럽다’고 하는데, 밤하늘 총총한 별과 산새소리가 서로 겹쳐지면서 우리의 시각과 청각을 한꺼번에 열어주는 구절이네요. 마지막 구절을 통해 시인님은 우리의 시선을 밤하늘로 옮겨주네요. 참 맑고 선선한 밤하늘이네요. 눅눅해진 마음이 뽀송해지는 처서입니다.
문태준 시인님의 산문 한 구절을 음미해 봅니다.
우리는 무용해 보이는 것들로부터 유용함을 발견한다.
돌멩이에서 보석을 캐내듯이 재화가 아닌 것에서 돈보다 값진 것을 발견한다.
가령 이즈음에 짧게 맛보는 투명한 가을 햇살도 마찬가지다.
또한 잠시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이나,
풀벌레 소리를 듣는 일이나,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일에서 우리는 행복을 맛보기도 하는 것이다.
- 문태준 산문집 「나는 첫 문장을 기다렸다」(마음의숲, 2022년) 중에서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문태준 시인님의 시 ‘맨발’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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