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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김수영 시 풀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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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님의 시 '풀'을 만납니다. 이 시는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을까요? 55년 전에 발표된 시인데, 오늘날에도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볼 수 있는 명징한 거울 같은 시입니다. 김수영 시인님이 닦아놓은 거울에 흐린 마음을 비춰 씻으며 함께 독서목욕을 해보십시다. 
 

1. 김수영 시 '풀' 읽기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 시선집 「거대한 뿌리」(민음사) 중에서

 
김수영 시인님(1921~1968)은 서울 태생으로 1945년 「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59년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펴냈습니다.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되었으며, 2001년 금관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그의 사후 「김수영 전집」,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거대한 뿌리」 등이 출간되었습니다. 형식 논리를 무시한 솔직한 시작 기법으로 지식인의 좌절과 고뇌 등을 담은 그의 시들은 한국 참여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2. 나약한 지식인을 향한 일갈

 
김수영 시인님의 시 '풀'은 풀의 이미지를 통해 민초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노래한 서정시로 해석되곤 합니다. 그런데 이 시에는 다른 국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국면일까요?

김수영 시인님은 자신의 시를 통해 희망을 노래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고단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를 다정하게 어루만지고 용기를 주려는 것 같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의 시들은 냉소적이고 비판적이어서 그 안에 매서운 일갈이 숨겨져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그의 일격에 주춤거릴 것이고, 어떤 이는 부끄러움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 시입니다.
 
시에 다가가는 여러 갈래의 길 중에서, 오늘 <독서목욕>은 김수영 시인님의 시 '풀'을 불의의 힘(바람)과 그에 기생하는 그룹(풀)의 구조로 톺아 읽습니다. 
 
풀이 눕는다 /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 풀은 눕고 / 드디어 울었다

- 김수영 시 '풀' 중에서

 
김수영 시인님은 '풀'을 불의의 힘에 아부하거나 길들여진 당대의 나약한 지식인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불의의 힘은 '비를 몰아오는 동풍' 같아서 그것이 불의인 줄 알면서도 명예나 권세를 위해 불의에 굴복하는 지식인이 있습니다.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 김수영 시 '풀' 중에서
 

이렇게 병든 지식인은 갈수록 불의에 단련됩니다. 불의에 자신의 지식을 봉사하고 그 불의가 잘 작동되도록 적극 가담합니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 발목까지 / 발밑까지 눕는다 /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 김수영 시 '풀' 중에서

 
이제 굴복과 복종이 일상화되어 불의의 힘이 그렇게 하도록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자동적으로 하게 되는 단계가 됩니다.
 

김수영시풀중에서
김수영 시 '풀' 중에서

 

 

3. 눕고 또 눕고 ··· 결국 그 뿌리까지 눕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 시 '풀' 중에서

 
'풀뿌리가 눕는다'는 의미는 올바른 생명체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근성(根性), 즉 뿌리의 성질은 바로 서기 위한 것입니다. 불의는 지속되고, 풀은 그에 가담하고 기생하다가 드디어는 근성이 굽어버렸습니다. 이제 똑바로 설 수 없게 되었네요.
 
여기서 풀은 불의의 힘에 맞서지 않고 가담하여 그것을 증폭시키는 누구나 상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풀의 종말에 대해 시인은 '풀뿌리가 눕는다'라고 말합니다.

김수영 시인님의 '풀'은 1968년 5월 29일 발표된 시입니다. 이 시를 발표하고 18일 뒤인 6월 16일에 그는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숨졌습니다. 마지막 시를 통해 당대의 나약하고 병든 지식인들에게 이렇게 시니컬한 경고를 하고 말입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삶의 비의를 알려주는 시를 더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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