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시인님의 시 '구성동(九城洞)'에 들어갑니다. 이 시는 그대에게 특별한 치유의 시간을 드릴 것입니다. 우리 함께 '구성동'이라는 신비로운 공간에 들어가 마음의 때를 씻으며 독서목욕을 해보십시다.
1. 정지용 시인님 '구성동' 읽기
구성동
- 정지용
골짝에는 흔히
유성이 묻힌다.
황혼에
누뤼가 소란히 쌓이기도 하고,
꽃도
귀양 사는 곳,
절텃드랬는데
바람도 모이지 않고
산 그림자 설핏하면
사슴이 일어나 등을 넘어간다.
- 「정지용 전집·시」(권영민 엮음, 민음사) 중에서
우리나라 '현대시의 아버지'라 불리는 정지용 시인님(1902~1950)은 충북 옥천 출신입니다. 옥천군청은 정지용 시인님을 기리는 축제인 '지용제' 홈페이지에서 정지용 시인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시적 대상의 적확한 묘사력과 언어조탁, 시적 기법의 혁신으로
모국어를 현대화시킨 최초의 모더니스트요 탁월한 이미지스트로서
한국을 대표하는 우리 시대 최고 시의 성좌'
2. 적막과 신비의 공간 '구성동'
이 시는 1938년에 발표됐는데, 제목 '구성동(九城洞)'은 금강산 내금강에 있는 계곡 이름입니다. 이 '동(洞)'은 오늘날의 행정단위가 아니라 '계곡'을 의미합니다. 신라시대 최치원 님이 만년에 숨어 살았다는 가야산 백운동(白雲洞) 같은 깊은 계곡을 말합니다.
그대는 이 시를 읽고 어떤 대목에서 마음이 설레었나요? 빗방울이네는 맨 마지막에서였습니다.
산 그림자 설핏하면 / 사슴이 일어나 등을 넘어간다
- 정지용 시 '구성동' 중에서
그곳이 얼마나 고요했으면, 산 그림자의 희미한 미동에 놀라 사슴이 움직였겠는지요? 이 시행에 놀란 사슴 같은 우리는 '일어나' 다시 이 시의 처음으로 가볼까요?
시의 처음 공간은 소란한 듯합니다. 별똥별(유성)이 흔하게 떨어지고, 우박(누뤼)도 소란스럽게 떨어지는 곳입니다. 그곳에 꽃이 피었는데, 이 외진 곳에 유배되어 일정기간 귀양살이 하듯 홀로 피었습니다.
이 꽃의 등장으로 우리의 시공간은 별안간 고요해졌습니다. 우리는 그 꽃의 외로움에 저마다의 외로움이 겹쳐져 온 심장이 쏠려 움직일 수조차 없습니다. 시인은 그렇게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를 더욱 단단한 얼음으로 고정시킵니다. 이렇게요.
절텃드랬는데 / 바람도 모이지 않고
- 정지용 시 '구성동' 중에서
'절터'라는 말은 우리를 우울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왜 더 이상 기도하지 않게 되었을까요? 사람은 물론, 아, 바람조차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평온했던 삶이 사라진, 폐허를 견디고 있는 사람들이 마음 눈에 보입니다. 이런 상황은 우리를 둘러싼 시공간의 고요함과 쓸쓸함을 고조시킵니다. 언제나 고단한 우리도 더 이상 갈 곳이 없고 아무 희망이 없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요, 그곳에 움직이는 생명체가 있습니다. 사슴입니다. 유성과 우박, 하늘에서 하강하는 사물들이 묻히고 쌓이는 신성한 공간에 사슴이 있네요. 산 그림자, 자연의 질서(!)가 그 생명체를 움직였습니다. 순간, 시공간에 있는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한 마리 사슴이 되어 '등'을 넘게 됩니다. '등'은 우리네 삶의 가파른 언덕이겠지요.
3. 치유의 공간 '구성동'으로 가다
우리는 힘든 일이 있을 때 누구라도 자신만의 '구성동'으로 갈 수 있습니다. 거기 유성과 누리가 묻히고 쌓이는 곳에서 한 떨기 꽃이 될 수 있습니다. 꽃이 되어 홀로 적막을 견딜 수 있습니다. 번다한 일상에서조차 우리는 저마다 귀양살이하듯 홀로 피었지만, 직박구리나 동박새가 찾아와 우리를 멀리 데려다줄 것입니다.
우리는 구성동에서 산 그림자에 놀라 '등'을 넘는 순한 사슴이 되어 저마다의 폐허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유성과 누리가 하늘에서 가져온 신비로운 기운을 안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고단할 때마다 정지용 시인님이 구축해 놓은 '구성동'에 다녀오십시다. 구성동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이겠지만 거기 도착하면 구성동은 저마다의 사연만큼 다 들어주고 품어줄 것입니다.
책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정지용 님의 시를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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