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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강소천 동시 풀벌레의 전화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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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천 시인님의 동시 '풀벌레의 전화'를 만납니다. 가을날의 풍경 속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시인님이 건네주신 동심으로 독서목욕을 하면서 저마다의 마음을 어리게 씻어봅시다.
 

1. 강소천 동시 '풀벌레의 전화' 읽기

 
풀벌레의 전화
 
- 강소천(1915~1963, 함경남도 고원)
 
따르르릉 ··· 따르르릉 ···
 
대낮에 풀벌레가 호박 영감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호박 영감님은 지금
낮잠이 한창인데요.
 
따르르릉 ··· 따르르릉 ···
 
그래도 호박 영감님은
가을볕이 좋다고 낮잠만 잡니다.
 
- 이놈의 영감쟁이 귀가 먹었나?
- 이놈의 전홧줄이 병이 낫나?
 
따르르릉 ··· 따르르릉 ···
 
- 옳아! 저놈의 영감쟁이 오늘도 낮잠이로구나.
 
따르르릉 ··· 따르르릉 ···
 
풀벌레는 자꾸만 자꾸만
종을 울렸습니다.
 
따르르릉 ··· 따르르릉 ···
 
그래도 그래도 호박 영감님의 낮잠은
깰 줄을 몰랐습니다.
 

- 강소천 동요시집 「호박꽃 초롱」(도서출판 재미마주, 2015년 1쇄) 중에서

 

2. 동시를 만나기 전에 만나보는 몇 가지 이야기

 
이 동시는 1941년 강소천 시인님 27세 때 발간된 동요시집 「호박꽃 초롱」에 실렸습니다. 이 동요시집은 강소천 시인님 탄생 100년을 맞아 2015년 도서출판 재미마주에서 옛모습 그대로 다시 출간되었습니다.
 
원래의 책과 달라진 점은, 책 크기가 커졌고, 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오늘날에 맞게 고쳐졌다는 점입니다. 원본과 조금 달라진 점은 있지만 그래도 500부 한정판으로 출간되었다는 초판인 듯 반갑네요.
 
이 동요시집에 우리가 좋아하는 강소천 시인님의 동시 '닭' '보슬비의 속삭임' '호박꽃 초롱' 같은 주옥같은 작품들이 들어 있습니다. 첫 소절만 감상해 봅니다.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 하늘 한 번 쳐다보고

- 강소천 동시 '닭' 중에서

 
나는 나는 갈 테야 / 연못으로 갈 테야

- 강소천 동시 '보슬비의 속삭임' 중에서

 
호박꽃을 따서는 / 무얼 만드나 / 무얼 만드나 

- 강소천 동시 '호박꽃 초롱' 중에서

 
이 동요시집에는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이 동요시집 첫머리에 백석 시인님의 '호박꽃 초롱 서시'가 있다는 점입니다. 늦깎이 제자이자 문인 후배인 강소천 시인님의 시집 발간을 축하하는 시입니다.
 
백석 시인님의 시 '호박꽃 초롱 서시'. 그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이러한 시인이 누구인 것을 세상은 몰라도 좋으나
그 이름이 강소천(姜小泉)인 것을 송아지와 꿀벌은 알을 것이다.

- 백석 시 '호박꽃 초롱 서시' 중에서

 
이 구절은 오늘 만나는 '풀벌레의 전화'를 가슴 깊이 안아보기 위한 징검다리가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송아지와 꿀벌은 아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강소천 시인님입니다. 
 
풀잎과 꽃, 벌레와 짐승, 구름과 비, 태양과 달 ······.
 
이런 자연의 친구들과 얼마나 친하고 서로 깊이 사랑했으면 송아지와 꿀벌은 강소천 시인님을 안다고 했을까요? 
 

강소천동시풀벌레의전화중에서
강소천 동시 '풀벌레의 전화' 중에서.

 

 

3. 아이가 되어 '환상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

 
이 가을, 누구나 풀벌레가 우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바로 이런 소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지요?
 
따르르릉 ··· 따르르릉 ··· / 대낮에 풀벌레가 호박 영감에서 / 전화를 걸었습니다. 

- 강소천 동시 '풀벌레의 전화' 중에서

 
우리는 풀벌레의 소리를 듣지만 그 '소리'만 듣는 것 같습니다. 그 소리의 '내용'은 잘 생각하지 않고요.
 
풀벌레가 왜 저리 울고 있을까? 풀벌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이런 시인님의 생각에서 시의 세계는 열리고 있습니다. 동심의 세계, 환상의 세계 말입니다.
 
호박 영감님은 지금 낮잠이 한창인데요

- 강소천 동시 '풀벌레의 전화' 중에서

 
호박 영감님이 낮잠을 자는 줄도 모르고, 풀벌레는 계속 전화를 걸고 있네요.
 
이런 설정은 어린이의 마음으로 쑤욱 내려가야 할 수 있는 거겠지요? 27세 때 발간된 동요시집이니 청년시절에 쓰인 동시입니다. 한창 혈기 왕성한 청년 강소천 시인님은 왜 이런 '상태'에 빠진 걸까요?
 
'트랜스(trance)'라는 단어가 떠오르네요. 외계와 접촉을 끊고 깊은 명상 상태에 잠기는 것을 말합니다. 대상에 대한 몰입과 소통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현실적인 감각이 차단되어 환상의 세계가 펼쳐지는 걸까요?
 
따르르릉 ··· 따르르릉 ··· / 그래도 호박 영감님은 / 가을볕이 좋다고 낮잠만 잡니다

- 강소천 동시 '풀벌레의 전화' 중에서

 
시인님의 코드는 '호박 영감님'의 입장으로 변환되었네요. '가을볕이 좋다고 낮잠만' 잔다고 하네요. 이렇게 '호박 영감님'의 마음속으로 쑤욱 들어가본 적이 있는지요?
 
'호박 영감님'은 늙은 호박이네요. 풀벌레의 입장에서는 늙은 호박이니 영감님이라고 부르는데, 이 또한 '풀벌레'의 마음 속으로 쑤욱 들어간 시인님의 천진한 발상이네요.
 
가을에 늙은 호박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시인님의 다른 시를 통해 잠깐 엿보겠습니다.
 
호박은 벌거벗구두 / 부끄러운 줄도 몰라 / 배꼽을 내놓구두 / 부끄러운 줄도 몰라

- 강소천 동시 '호박' 전문

 
하하, '호박 영감님'은 이렇게 배꼽을 내놓고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낮잠을 자고 있었네요. '벌거벗구두' '내놓구두'라는, 어린이 입말 좀 보셔요. 시인님의 어리광도 대단하지요? 다시 '풀벌레의 전화'로 돌아옵니다.
 
이놈의 영감쟁이 귀가 먹었나? / 이놈의 전홧줄이 병이 났나?

-  강소천 동시 '풀벌레의 전화' 중에서

 
시인님은 다시 '풀벌레'의 마음속으로 쑤욱 들어왔네요. 이때의 시인님은, 상대방이 안 듣는 말(독백)로, 생각대로 말하는 '풀벌레'로 '트랜스'되었습니다. 지금 시인님은 바쁜 일인이역이네요.
 
따르르릉  ··· 따르르릉  ··· / 옳아! 저놈의 영감쟁이 오늘도 낮잠이로구나?
따르르릉  ··· 따르르릉  ··· / 풀벌레는 자꾸만 자꾸만 / 종을 울렸습니다
따르르릉  ··· 따르르릉  ··· / 그래도 그래도 호박 영감님의 낮잠은 깰 줄을 몰랐습니다

- 강소천 동시 '풀벌레의 전화' 중에서

 
아하. 그래서 가을이면 끊임없이 귀뚜리가 울고 땅강아지가 울고 팥중이가 울고 방아깨비가 울고 있었군요!
 
호박이 익어가고 있고 풀벌레가 울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을날의 한 풍경 속으로 시인님이 풍덩 들어가 보니 늙은 호박은 배꼽을 내놓은 채 낮잠에 빠져 있었고, 풀벌레는 늙은 호박에게 계속 전화를 하고 있었네요. 저놈의 영감쟁이! 하면서요. 이 얼마나 아름다운 환상인지요?
 
그 이름이 강소천(姜小泉)인 것을 송아지와 꿀벌은 알을 것이다

- 백석 시 '호박꽃 초롱 서시' 중에서

 
이제야 이 구절이 쏙 다가오네요. 강소천 시인님이 송아지와 꿀벌과 친하다고 한 이유 말입니다.
 
그것이 환상 속의 장면이라 넘겨버리기에는 때때로 현실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우리는 그 아름다운 환상 속으로 들어가고만 싶습니다. 그 속에서는 나의 '어린이 마음'이 맑고 밝게 웃고 있을 테니까요.
 
자, 우리 시인님과 함께 '어린이 마음'으로 '트랜스'해서 가을의 오솔길을 걸어볼까요? '어린이 마음'으로는 뭐가 보이고 들리게 될까요? 어서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강소천 시인님의 시 '호박꽃 초롱'을 만나 보세요.

 

강소천 동시 호박꽃 초롱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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