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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황동규 시 시월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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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시인님의 시 '시월'을 만납니다. 이 시를 낭송하고 있으면 강물소리가 들리고 그리운 이가 떠오릅니다. 시인님이 건네주신 시월의 강물로 저마다의 마음 씻으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황동규 시 '시월' 읽기

 
시월(十月)
 
- 황동규(1938년~ , 서울)
 

1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江)물을
석양(夕陽)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旅程)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2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리
두견이 우는 숲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목금(木琴)소리 목금(木琴)소리 목금(木琴)소리.
 

3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 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4

 
아늬,
석등(石燈) 곁에
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하나
달이 지는데
밀물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사면(四面)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
석등(石燈) 곁에 
밤 물소리.
 

5

 
낡은 단청(丹靑) 밖으론 바람이 이는 가을날, 잔잔히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 며칠내 며칠내 낙엽이 내리고 혹 싸늘히 비가 뿌려와서 ··· 절 뒷울 안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낙엽지는 느릅나무며 우물이며 초가집이며 그리고 방금 켜지기 시작하는 등(燈)불들이 어스름 속에서 알 수 없는 어느 하나에로 합쳐짐을 나는 본다.
 

6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를 않고 등(燈)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鄕愁)와 같은 것에 싸여 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 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 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 황동규 시선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민음사, 1975년 초판, 1988년 중판) 중에서

 

2.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황동규 시인님의 시 '시월'은 시인님의 등단작입니다. 1958년 서정주 시인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실렸던 작품입니다. 시인님이 20세에 쓴 시네요. 시를 썼을 때는 시인님의 대학 1학년 끝무렵이었습니다. 저마다 '청춘 모드'로 변환하여 이 시를 만나봅니다.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 황동규 시 '시월' 중에서

 
첫 행입니다. 시의 첫행은 '뮤즈'가 불러준다고 했던가요? 참으로 유명한 첫행입니다. 왜 시월의 강물일까요?
 
시간적으로 10월은 한 해의 저물녘입니다. 또 시의 강물은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이 있는 저녁강의 강물이네요. 한 해가 저물고 하루가 저무는 시공간이 바로 시월의 저녁강물입니다. 뜨겁거나 차거웠던 사랑의 추억들이 서로 부드럽게 섞여 흐르는 것만 같습니다. 얼마나 평화로운지요?
 
그 고요하고 아늑한 저물녘 강가에 홀로 있으면 사랑하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지난날'의 '슬픈 여정들'과 '아득한 기대를' 말입니다. 
 
목금소리 목금소리 목금소리

- 황동규 시 '시월' 중에서

 
목금(木琴)은 실로폰이라고 사전에 나오는데, 여기서는 어울리지 않는 악기입니다. 시의 분위기로 보아 오히려 목탁(木鐸)에 가까운 기운을 가진 시어네요. 이 미지의 악기가 달빛 속에서 소리를 내고 있다고 합니다. 알 수 없어 더 신비로운 그 소리가 열정과 방황 가득한 우리의 청춘 이야기들을 이불처럼 덮어 재워주는 것만 같습니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 황동규 시 '시월' 중에서

 
가을은 쇠락과 소멸의 계절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많아지는 계절입니다. 가을비 소리는 사색의 연주일까요? 우리 다시 만나자던 약속, 그러나 만나지 못한 약속, 그래서 잊고 싶은 그 약속을 시월의 가을비 소리가 불현듯 소환하네요. 기억의 지층에는 얼마나 많은 미련들이 웅크리고 있을까요?
 
아늬, / 석등 곁에 밤 물소리

- 황동규 시 '시월' 중에서

 
'아늬'는 '아느냐' '아니' '아' 등의 느낌으로 다가오네요. 그중에서도 감탄사 '아'로 새겨봅니다. 시의 공간이 절로 이동했습니다. 절의 고요함, 캄캄함 속에서 물소리만 들리네요. 물소리를 따라 화자의 마음도 어둠 속으로, 기억의 지층 속으로 한없이 흘러가고 있네요. 그러면 그대도 그리운 이가 생각나겠지요?
 
누이가 무엇하나 / 달이 지는데

- 황동규 시 '시월' 중에서

 
누이는 흔히 손아래 여자를 부르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화자가 연모하는 '그리운 이'로 새깁니다. '밀물지는 고물'. 배 뒷전으로 달이 지고 있습니다. 달이 지고 더 어두워지는 공간에서 시의 화자는 그리운 이가 더 그리워졌겠습니다. 이 장면에서 '아늬, / 석등 곁에 밤 물소리'가 한번 더 등장합니다. 애틋해진 화자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밤 물소리입니다.
 

황동규시시월중에서
황동규 시 '시월' 중에서.

 

 

3. '좀 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절 뒷울 안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낙엽지는 느릅나무며 우물이며 초가집이며 그리고 방금 켜지기 시작하는 등불들이 어스름 속에서 알 수 없는 어느 하나에로 합쳐짐을 나는 본다

- 황동규 시 '시월' 중에서

 
시의 화자에게 사물들이 새롭게 보이는 시간입니다. 외따로이 존재하는 것만 같던 '느릅나무' '우물' '초가집' '등불'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네요. 나도 그 풍경 속의 하나라는 점을 알게 되었을까요? 나는 외따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써 하나의 풍경을 이루며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요?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 황동규 시 '시월' 중에서

 
우리는 얼마나 불빛이 그리운지요? 긴 어둠 속을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불빛을 원하는지요? 그 힘든 여정이 끝나는 곳, 불빛이 있는 곳에는 몸을 감싸줄 따뜻한 온기가 있고 허기를 채워줄 맛있는 음식이 있고 피곤한 육신을 받아줄 잠자리가 있겠지요?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 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 황동규 시 '시월' 중에서

 
황동규 시인님의 시에는 다채로운 여행의 여정들이 가득합니다. 끊임없이 떠도는 시인님의 삶은 낯선 곳에서 낯선 풍경을 만나며 성숙해 가는 시간의 연속인 것만 같습니다. 
 
시 '시월'에서도 20대인 시의 화자는 시월의 저녁 강가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절로 올라갔다가 다시 마을로 내려오는 서정적인 여정을 밟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물들이 하나의 풍경으로 합쳐지게 됨을 보게 된 시의 자아는 자신도 낙엽처럼 강물처럼 가을비처럼 목금소리처럼 '이제 좀 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는 깨달음을 갖게 되었네요.
 
시 '시월'의 여정을 통해 위로 올라가려고만 하던 우리도 '이제 좀 더 낮은 곳'을 지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시의 화자와 함께 낮은 곳으로 내려오면서 만물에 더 정다워지고, 그래서 더 따뜻하고 편안한 기분이 되네요. 들끓던 마음을 떠뜻하게 가라앉혀주는 보약, '시월'이네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황동규 시인님의 시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을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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