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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김규동 시 천상병 씨의 시계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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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동 시인님의 시 '천상병 씨의 시계'를 만납니다. 이 시는 어떤 삶의 풍경을 품고 있을까요? 시인님이 데워놓은 슬프고도 따스한 목욕물에 마음을 씻으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규동 시 ‘천상병 씨의 시계’ 읽기


천상병 씨의 시계

- 김규동(1925~2011, 함북 종성)

어려운 부탁 한 번 한 뒤면
주먹만큼 큼직한 동작으로
저고리 소매를 걷어올리고
시계를 봤다
칠이 벗겨진
천상병 씨의 시계에
남도 저녁노을이 비꼈다
시계 없이도
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노라고
얼어드는 언어의 층계를 오르내리는 내게
천상병 씨의 낡아빠진 시계는
어째서 자꾸
뭉클한 감정만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일까.


- 김규동 시선집 「깨끗한 희망」(창작과비평사, 1985년) 중에서


2. '어려운 부탁 한 번 한 뒤면'


천상병 시인님(1930~1993)이 김규동 시인님(1925~2011)보다 다섯 살 아래 후배시인이네요. 위 시선집에 따르면, 이 시가 쓰인 시기는 1977년~1984년 사이고, 김규동 시인님의 시 '천상병 씨의 시계'의 일화는 천 시인님 40대 후반, 김 시인님 50대 초반의 일로 보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외로운 이방인'이었습니다. 함북 종성이 고향인 김 시인님은 1948년 서울에 시 공부하러 내려왔다가 그만 고향에 가지 못하고 평생 고향을 그리며 살고 있었네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며 변변한 직장 없이 살던 천 시인님도 이 사회의 낮은 데서 살고 있었고요. 천 시인님의 외로움이 김 시인님의 쓸쓸함에 기대어서 먼 길 가고 있었네요. 또는 그 반대로요.

어려운 부탁 한 번 한 뒤면

- 김규동 시 '천상병 씨의 시계' 중에서

 
천 시인님은 다섯 살 형뻘인 김 시인님에게 '어려운 부탁'을 자주 한 모양입니다. 천 시인님의 '어려운 부탁'은 문단의 소문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걸 부탁하지는 않았던 거 같습니다.
 
'막걸리 한 사발 값만 도고!' 

부산에 지낼 때 천상병 시인의 단골 용돈 조달창구는 동갑내기 최계락 시인님이었습니다.
 
'신태범의 부산문화 야사(野史)'(국제신문 2000.12.8)에 따르면, 최계락 시인님의 국제신문 문화부장과 편집부국장 시절에 천상병 시인님은 원고료 가불(!) 명목으로 수시로 손을 내밀었다고 합니다. 물론 최 시인님은 거절한 적이 없었고요. 최 시인님이 자리에 없으면 다른 직원들에게 돈을 꾸어갔다고 합니다. 나중에 최 시인한테 받으소! 하면서요.
 
그렇게 쉬이 빌려가는 듯해도 그때마다 '어려운 부탁'이었겠지요? 그런 '어려운 부탁'을 한 다음에 하는 천 시인님의 행동은 이렇습니다.
 
주먹만큼 큼직한 동작으로 / 저고리 소매를 걷어올리고 / 시계를 봤다

- 김규동 시 '천상병 씨의 시계' 중에서

 
'어려운 부탁'을 해놓고선 상대방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네요. 그 어색한 시간, 상대방이 오늘 이 천상병에게 얼마를 빼앗길 것인지, 혹은 어떤 말로 거절한 것인지 생각했을 그 짧은 동안요. 아무리 맡겨놓은 돈을 찾아가는 듯이 당당하게 돈을 꾸는 천상병 시인님이라 해도 그 짧은 사이 무어라도 해야 되겠는데요, 그것이 과장된 몸짓으로 손목을 드러내 시계를 보는 거였군요!
 
그 동작 좀 보셔요. '주먹만큼 큼직한 동작으로 저고리 소매를 걷어올리고'요. 아주 긴요한 약속시간이 다 되었다는 듯이요. 그래서 지금 아주 바쁘니까 빨리 가야 한다는 듯이요. 그러니 어서 '막걸리 한 사발 값' 내놓으라는 듯이요. 이 장면은 얼마나 애절한지요?
 
천상병 시인님의 '시계 보는 동작'에는 천상병 시인님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오롯이 들어있네요. 가난하게 살면서도 부(富)를 부러워하지 않고, 낮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높은 자리를 올려다보지도 않고, 돈을 빌리면서도 비굴하지 않고(시계를 보는!) 천진한 아이와 진지한 어른이 함께 사는 '시인 천상병의 몸'을 과연 누가 흉내라도 낼 수 있겠는지요.
 

김규동시천상병씨의시계중에서
김규동 시 '천상병 씨의 시계' 중에서.

 

 

3. 천상병 씨의 낡아빠진 시계는 어째서 자꾸 뭉클한가!

 
칠이 벗겨진 / 천상병 씨의 시계에 / 남도 저녁노을이 비꼈다

- 김규동 시 '천상병 씨의 시계' 중에서

 
'어려운 부탁'을 해놓고 손목시계를 보는 천 시인님을 앞에 두고, 김 시인님은 '오늘 이 친구에게 얼마를 잃어야 하나?' 하고 가늠했을까요? 그때 김 시인님의 시야에 쓱 들어온 저 ‘천상병 씨의 시계!’. 칠이 벗겨졌다고 합니다. 그 시계에 '남도 저녁노을'이 비스듬히 비친다고 하네요. 그만큼 낡았다는 말이네요. 5천 원짜리를 꺼내려다 시계에 뭉클해져서는 나도 모르게 만 원짜리 두어 장 꺼낼 수밖에 없었겠네요. 

시계 없이도 / 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노라고 / 얼어드는 언어의 층계를 오르내리는 내게
천상병 씨의 낡아빠진 시계는 / 어째서 자꾸 / 뭉클한 감정만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일까

- 김규동 시 '천상병 씨의 시계' 중에서


김규동 시인님은 생각합니다. 나도 시인인데, 세상의 잣대로 잴 수 없는 것들을 탐색하는 시인인데, 그래서 '시계 없이도' 세상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으리라 자신하는 시인인데, 어쩌자고 나는 자꾸 저 낡아빠진 시계에 꽂혀 꼼짝을 못 한단 말인가! 도대체 저 친구는 어쩌자고 낡아빠진 시계를 차고 다니면서 이토록 나를 뭉클한 심연으로 데려가는 것인지! 이 홈 패인 도시에 맞지 않는, 낯선 시간이 흐르는 시계여! 가지고 싶지만 영영 가질 수 없는 시계, 절창의 시이며 시인이여! 
 
어려운 부탁 한 번 한 뒤면 / 주먹만큼 큼직한 동작으로 / 저고리 소매를 걷어올리고 / 시계를 봤다

- 김규동 시 '천상병 씨의 시계' 중에서


다시 첫 줄을 읽어봅니다. 문득 천상병 시인님이 되어 손목의 시계를 보게 되네요. 저고리 소매를 쓰윽 걷어올리면서요. 저 친구, 오늘은 ‘배추 이파리’ 두어 장 꺼내겠지! 
 
고개를 드니 천장에서 천상병 시인님이 내려다보시네요. 뭘 그걸 가지고 감상에 빠져 그러고 있나. 우리 삶은 생각처럼 그리 팍팍하지만은 않아. 그래도 낡아빠진 시계는 이제 낡아빠진 수법이야. 좀 선진적인 방법을 개발해 보아. 그러려면 네가 온통 낮아져야지. 온통 지워져야지. 그걸 알려달라? 막걸리 한 사발 값만 도고!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김규동 시인님의 시 '느릅나무에게'를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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