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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백석 시 고방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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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인님의 시 '고방'으로 들어갑니다. '고방'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시인님이 건네주신 따뜻한 추억의 목욕물로 저마다의 마음을 씻으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고방' 읽기

 
고방
 
-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낡은 질동이에는 갈 줄 모르는 늙은 집난이 같이 송구떡이 오래도록 남어있었다
 
오지항아리에는 삼춘이 밥보다 좋아하는 찹쌀탁주가 있어서
삼춘의 임내를 내어가며 나와 사춘은 시큼털털한 술을 잘도 채어 먹었다
 
제사ㅅ날이면 귀머거리 할아버지가 예서 왕밤을 밝고 싸리꼬치에 두부산적을 께었다
 
손자아이들이 파리떼같이 뫃이면 곰의 발 같은 손을 언제나 내어둘렀다
 
구석의 나무말쿠지에 할아버지가 삼는 소신 같은 집신이 둑둑이 걸리어도 있었다
 
넷말이 사는 컴컴한 고방의 쌀독 뒤에서 나는 저녁 끼때에 불으는 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하였다
 

- 백석 시집 「사슴」 복원본(도서출판 소와다리, 2016년)

 

2. '집난이 같이 송구떡이 오래도록 남어있었다'

 
위 책은 백석 시인님의 시집 「사슴」의 1936년 초판본을 그대로 복원한 책입니다. 원본 활자의 느낌을 그대로 재현해 출간된 초판본 「사슴」에서 백석 시인님의 시 '고방'을 읽습니다. 시집의 세 번째 시로, 띄어쓰기만 오늘에 맞게 조정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읽어보려 합니다.
 
시집 「사슴」은 속지를 한지로 사용했고 '자루매기 제본'으로 속지 한 장에 두 장의 한지가 접혀있는 독특한 형태의 시집입니다. 오늘 만나는 시 '고방'은 2쪽에 걸쳐 14줄의 시가 세로쓰기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시는 모두 7행인데 한 행의 길이가 길어 한 행에 두 줄씩 배열되어 있네요.
 
백석 시인님이 직접 교정을 보았을 페이지, 수많은 시인과 독자들이 눈으로 손으로 페이지를 쓰다듬으며 음미했을 페이지 속으로 들어갑니다.
 
'고방'은 광을 말합니다. 먹거리나 세간 같은 집안의 각종 잡동사니를 보관하는 방을 말하네요. 곳간을 뜻하는 '고(庫)'에 방이 붙여진 이름이네요. 요즘에도 방 하나를 고방으로 사용하는 집도 있지요?
 
낡은 질동이에는 갈 줄 모르는 늙은 집난이 같이 송구떡이 오래도록 남어있었다

- 백석 시 '고방' 중에서

 
첫 구절부터 마음이 찡해지네요. '갈 줄 모르는 늙은 집난이' 때문에요. 백석 시인님 고향 평북에서는 시집간 딸을 집난이라고 한답니다. 그녀는 왜 시댁에 가지 않고 본가에 눌러 있었을까요? 송구떡처럼요.
 
송구떡. 과거에는 먹을 게 없어서 소나무 속껍질까지 식재료로 떡으로 해 먹었네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송구떡도 딱딱해 식구들이 잘 쳐다보지 않게 되었겠네요. 그래서 아까워 버리지도 딱딱해 먹지도 못해 질동이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신세입니다.
 
집난이 신세도 그렇다고 합니다. 출가했던 늙은 딸이 명절 때 본가에 다니러 왔던 걸까요? 명절이 지났는데도 시댁에 돌아가지 않고 차일피일 본가에서 뭉기적거리나 봅니다. 어머니 아버지, 형제자매가 있는 따뜻한 본가의 둥지를 쉬이 떠나지 못하는 아픈 사연이 있나 봅니다. 그렇지만 어머니 아버지는 '집난이'에게 이제 돌아가라고 쉬이 말하지 못했겠네요. 그래서 고방에 뒹구는 송구떡처럼 본가에 오래도록 남아있네요. 이 구절을 다시 한번 읽습니다.
 
낡은 질동이에는 갈 줄 모르는 늙은 집난이 같이 송구떡이 오래도록 남어있었다

- 백석 시 '고방' 중에서

 
어느 가족이라도 '송구떡' 같은 일원 하나쯤은 있어서 서로 사랑하게 하고 미워하게도 하면서 언제나 끈끈한 정으로 살아가게 하는 걸까요?

백석시고방중에서
백석 시 '고방' 중에서.

 

 

 

3. '저녁 끼때에 불으는 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하였다'

 
오지항아리에는 삼춘이 밥보다 좋아하는 찹쌀탁주가 있어서
삼춘의 임내를 내어가며 나와 사춘은 시큼털털한 술을 잘도 채어 먹었다

- 백석 시 '고방' 중에서

 
하하. 이 구절을 읽고 있는 그대의 사건기록도 드러나는 순간이네요. 빗방울이네도 가담했던 일입니다. 고방에 커다란 독이 있었어요. 어머니가 그 독에 포도주를 가득 담아놓았어요. 그해 여름의 포도를 독 속에 가두어놓고 발효 중이었던 거죠. 우리 형제는 어른들 몰래 독 속으로 머리를 디밀어 발효 중이던 포도알을 한 주먹씩 꺼내 먹곤 했답니다. 좀 위험한 군것질이었네요. 발효된 포도알에 취해 그 독 뒤에서 기절한 듯 잠에 빠지는 바람에 어머니에게 들켰던 빗방울이네 형제였네요. 고방은 어른들에게 들키면 혼나는, 아이들의 모험들이 가득한 공간이었네요.
 
제사ㅅ날이면 귀머거리 할아버지가 예서 왕밤을 밝고 싸리꼬치에 두부산적을 께었다
손자아이들이 파리떼같이 뫃이면 곰의 발 같은 손을 언제나 내어둘렀다
구석의 나무말쿠지에 할아버지가 삼는 소신 같은 집신이 둑둑이 걸리어도 있었다

- 백석 시 '고방' 중에서

 
위의 파란색 구절은 초판본 「사슴」에 아래처럼 표기되어 있습니다. '귀머거리' '할아버지' '예서'가 다 붙어있네요.
 
귀머거리할아버지가예서
 
이렇게 단어들이 모두 붙어있는 바람에 이 구절이 '귀머거리 할아버지 가에서'로 읽히곤 합니다. 그러나 독서목욕에서는 '귀머거리 할아버지가 여기서'로 새깁니다. 즉 '귀머거리 할아버지가 여기 이 고방에서'라는 의미가 더 생생한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귀머거리 할아버지 가에서'로 읽는 경우의 문제는 이렇습니다. 시의 화자인 내가 어릴 때 제삿날에 할아버지 옆에서 왕밤을 까고 산적을 꿰었다는 말인데, 어린아이가 그런 일을 도왔다는 점이 조금 어색해지네요. 딱딱한 왕밤 껍질을 까려면 칼을 사용해야 하고, 제사상에 올릴 산적을 꿰는 일은 아이에게 시킬만한 일은 아니니까요.

'귀머거리 할아버지가 여기서'로 읽고, 할아버지가 왕밤을 까고 두부산적을 꿰는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할아버지 옆에서 그 일을 지켜보는 아이에게 그 장면은 얼마나 다정했겠는지요. 이런 장면은 아무리 오래 지켜보아도 지겹지 않습니다. 가족이라는 따뜻함, 공동체의 아늑함 때문일까요? 그래서 이런 장면은 저마다의 '인생컷'으로 뇌리에 각인되는 걸까요? 
 
넷말이 사는 컴컴한 고방의 쌀독 뒤에서 나는 저녁 끼때에 불으는 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하였다

- 백석 시 '고방' 중에서

 
이 마지막 구절은 우리를 저 높은 은하 쪽으로 데려다주네요. 왜 그럴까요?
 
'넷말'은 옛말, 즉 추억으로 새깁니다. 고방에 일어났던 정다운 일들요. 귀머거리 할아버지와 삼춘과 사춘, 송구떡 같은 것들에 스며있는 추억들요. '나'는 쌀독에 기대어 까무룩 아득한 추억 속으로 잠겨들었네요. 그때 어머니가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려오네요.
 
기행(백석 시인님 본명)아, 저녁 먹자, 오디갔니!
 
어머니가 부릅니다. 추억 속에서 어머니 음성이 아스라이 들립니다.
 
여보, 우리 기행이 못 봤나요?
야가 요새 밥도 잘 안 먹고 비쩍 말라 걱정이네.
지 좋아하는 고깃국도 끓여놨는데, 오디 갔니.
기행아, 밥 먹자, 오디 있니!
 
이렇게 숨어서 듣는 어머니의 음성은 얼마나 정다운지요. 평소 내 앞에서 잘 안 하는, 나를 걱정하는 말들을 숨어서 듣는 일은 얼마나 따뜻한지요. 어머니의 속내가 다 들어있는 깊은 말들은 얼마나 오래오래 듣고 싶은지요.
 
빗방울이네도 쌀독 뒤에 숨어서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걱정을 숨어서 자꾸 듣고 있고 싶습니다. 숨어서 어머니의 따스한 '사랑샤워', 오래오래 하고 싶습니다.
 
글 읽고 마음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백석 시인님의 시 '호박꽃 초롱 서시'를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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