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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박진규 시 화엄사 중소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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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시인님의 시 '화엄사 중소'를 만납니다. 화엄사 계곡에 사는 갈겨니와 늙은 상수리나무의 이야기입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시가 건네주는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 마음을 씻으며 독서 목욕을 하십시다.
 

1. 박진규 시 '화엄사 중소' 읽기

 
화엄사 중소(中沼)
 
- 박진규(1963~ , 부산)
 
갈겨니는 계곡 물빛이어서
계곡이 아무리 유리알처럼 투명하여도
자신은 감쪽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하루 종일 내려다보고 있는
늙은 상수리나무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물속을 헤집고 다니는 갈겨니
그 여리디여린 몸이 가을빛을 받아
바닥에 지 몸보다 더 큰 그림자를 끌고 다닌다는 것을
상수리나무는 행여 배고픈 날짐승이 눈치챌까봐
아침부터 우수수 이파리들을 떨어뜨려
어린 갈겨니를 덮어주었던 것이다
 

- 박진규 시집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도서출판 신생, 2016년 1쇄, 2017년 2쇄) 중에서

 

2. 상수리가 이파리를 떨어뜨린 까닭은?

 
오늘 만나는 시 '화엄사 중소(中沼)'는 시집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의 첫 번째 시로 실려 있습니다. 어느 시집이라도 그 시집의 첫번째 시는 '반갑습니다' 하는 시인님의 다정한 눈인사입니다. 첫 시는 시집의 길잡이입니다. 아, 이런 느낌의 시들이 있겠구나. 시인님이 선발한 대표선수, 어떤 시일지 지금 만납니다.
 
갈겨니는 계곡 물빛이어서

- 박진규 시 '화엄사 중소' 중에서

 
갈겨니는 계곡이나 하천에 사는 자그마한 민물고기네요. 피라미처럼 생겼는데, 피라미와는 다른 물고기입니다. 맑은 물에 사는 물고기네요. 제목이 '화엄사 중소(中沼)'이니, 시인님은 구례 화엄사 절옆으로 흐르는 계곡에서 갈겨니를 만났나 봅니다. 
 
계곡이 아무리 유리알처럼 투명하여도 / 자신은 감쪽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박진규 시 '화엄사 중소' 중에서

 
화엄사 계곡에 '중소(中沼)'라는 이름의 자그마한 소(沼)가 있나 봅니다. 아니면 아주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이름 없는 물웅덩이를 말하는 걸까요? 우리는 이 구절에서 시인님의 모습이 그려지네요. 계곡에 내려가 물 웅덩이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꿇고 물속에서 놀고 있는 갈겨니들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는 시인님요.
 
얼마나 오랫동안 갈겨니를 지켜보았을까요? 시인님은 마침내 갈겨니로 트랜스(trance) 되었네요. 갈겨니의 입장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갈겨니의 몸은 계곡 물빛과 비슷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물속의 갈겨니를 잘 발견하지 못하겠네요. 그래서 갈겨니의 입장이 된 시인님은 '외계'가 자신을 찾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계곡 물빛이니까요. 
 
그러나 위에서 하루 종일 내려다보고 있는 / 늙은 상수리나무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 박진규 시 '화엄사 중소' 중에서

 
물웅덩이의 갈겨니를 바라보던 시인님의 시선이 문득 하늘을 향합니다. 거기에 상수리나무가 있네요. 나이가 많은 상수리요. 키가 크고 몸피가 굵었겠네요. 시인님은 이제 늙은 상수리나무가 되었습니다. 늙은 상수리나무가 되어보니 다 보였네요. 무엇이 보였을까요?
 

박진규시화엄사중소중에서
박진규 시 '화엄사 중소' 중에서.

 

 

3. 따뜻하고 환상적인 동화의 세계에서 알게 된 것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물속을 헤집고 다니는 갈겨니 / 그 여리디여린 몸이 가을빛을 받아 / 바닥에 지 몸보다 더 큰 그림자를 끌고 다닌다는 것을

- 박진규 시 '화엄사 중소' 중에서

 
상수리의 입장이 된 시인님이 발견한 것은 갈겨니의 그림자였네요. 갈겨니는 계곡 물빛이어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햇빛을 받으니 그림자가 생겼네요. 시커먼 그림자이니 '외계'가 금방 알아보겠네요. 
 
상수리는 행여 배고픈 날짐승이 눈치챌까봐 / 아침부터 우수수 이파리들을 떨어뜨려 / 어린 갈겨니를 덮어주었던 것이다

- 박진규 시 '화엄사 중소' 중에서

 
물 위에 떠다니는 상수리나무의 이파리들. 그 이파리들은 상수리나무가 날짐승들로부터 어린 갈겨니를 지켜주기 위해 떨어뜨린 것이라고 시인님은 말합니다. 아, 고마운 상수리나무님!
 
이 시 속에는 이렇게 따뜻하고 환상적인 동화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네요.
 
그런데 이런 일들이 동화의 환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일까요? 시 '화엄사 중소'는 우리 삶에서도 시시각각 누군가는 누군가를 안아주고 있고, 또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안겨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문득 '연기(緣起)'라는 단어가 떠오르네요.
 
존재는 연기에 의해, 외부원인에 의해 존재한다고 붓다는 말합니다. 모든 현상은 '공(空)'이라고 하는데, 이때 공은 없다거나 안이 비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외부원인에 의존하며 존재하니까, 관계로써 이루어진 존재니까 외따로이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다행인지요? 이 광대한 화엄세계 속에서 내가 외따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위안인지요? 내가 '나 아닌 것'으로 존재하므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나 아닌 것'이 없는 존재, 외따로이 존재하는 나라면 얼마나 고독할까요? 아니 과연 삶을 지속할 수나 있을까요?
 
시 '화엄사 중소'는 내가 지켜주고 있는 갈겨니는 누구인지, 나를 보호해주고 있는 상수리나무는 누구인지 생각해보게 하는 시네요.

그대는 누구의 갈겨니인지요, 또 누구의 상수리나무인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박진규 시인님의 시를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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