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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황동규 시 풍장 1

by 빗방울이네 2024.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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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시인님의 시 '풍장 1'을 만납니다. 죽음을 직시하고 이해하며 삶의 의미를 헤아리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황동규 시 '풍장 1' 읽기

 

풍장 1

 

황동규(1938년~ , 서울)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튀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황동규 연작시집 「풍장」(문학과지성사, 1995년) 중에서

 

2. 어디 여행가듯 가볍고 편안하게 죽음 직시하기

 

황동규 시인님의 시 '풍장 1'은 1982년 작품입니다. 시인님 44세 즈음이네요. 

 

'풍장(風葬)'이란, 시신을 외진 곳에 모셔두고 비바람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게 한 후 남은 뼈를 추려 매장하는 장례 방식입니다.

 

시신을 바깥에 모셔둔 장소를 '초분(草墳)'이라고 합니다. 풀무덤이네요.

 

초분에 모셔진 시신은 몇 년이 지나 육탈(肉脫)된 뼈로 남는다고 합니다. 나중에 이 백골을 수습해 매장하게 됩니다.

 

서해와 남해안 섬지방에서 행해지다 위생 문제 등으로 금지되어 사라지게 된 장례 풍습입니다.

 

'풍장 1'은 이 낯선 장례법을 소재로 한 시네요.

 

40대 중반에 이른 시인님은 이 시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풍장 1'을 만나는 길은 많겠지만, 오늘은 독서목욕이 낸 오솔길로 함께 가봅니다.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 섭섭하지 않게 /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 손목에 달아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

군산에 가서 / 검색이 심하면 / 곰소쯤에 가서 /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죽음을 이처럼 가볍게 응시할 수도 있을까 싶습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무겁고 두렵고 슬프고 외면하고 싶은 것인데, 시인님에게는 이처럼 어디 여행가듯 가볍고 편안한 것이 죽음인 것만 같습니다. 

 

'섭섭하지 않게'. 시인님은 자신이 죽었다고 금방 시신을 벗겨 씻기는 저승길 몸단장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무 섭섭할 것 같다고 하네요. 아직은 입던 옷 벗기지 말라고 하네요. 죽었다고 하더라도 당장은 자신을 일상과 완전 단절시키지 말라고 하네요. 일상적으로 하던 그대로 해달라고 하네요.

 

'전자시계'는 왜 벗기지 말라고 했을까요? 시인님은 삶의 시간과 죽음의 시간을 경계짓는 것을 원치 않네요. 그래서 '아주 춥지 않게' 자신의 죽음을 다루어달라고도 하고요. 죽음이 일상의 연장인 듯 가볍게 맞이하려는 시인님의 마음이겠네요.

 

'검색'. 이제 '풍장'은 금지된 장례풍습입니다. 뒤의 2연에 나오는데, 시인님이 풍장을 시켜달라고 하는 장소가 무인도입니다. 무인도에 들어가려면 승선 검색에 걸릴 수 있으니 군산 같은 큰 항구보다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달라고 하네요. 이는 무인도 여행 세부실행 계획이라고 할까요?

 

"바람과-놀게"-황동규-시-'풍장-1'-중에서.
"바람과 놀게" - 황동규 시 '풍장 1' 중에서.

 

 

 

3. 죽음을 직시하며 이해하며 삶을 직시하며 이해하기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튀기는 씨들을 /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 조각도 /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그 좁은 가죽가방 속은 어머니 뱃속일까요? 죽음이 그렇게 다시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는 일이라면, 그렇게 오그리고 있어도 얼마나 편안할까요?  

 

선유도는 전북 군산에 속한 섬입니다. 예전에 이곳 선유도에서 풍장이 행해졌을까요? 시인님은 지금 선유도 근처의 어느 무인도에 왔습니다. 

 

'잠시 정신을 잃고'. 통통배가 육지에 대려고 부딪히는 충격에 잠시 정신을 잃었다고 하는 장면에서도 죽음이 삶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시인님의 죽음에 대한 성찰이 느껴지는 대목이네요.

 

드디어 무인도에서 풍장을 위한 제의(祭儀)가 시작되네요. 가방, 옷, 구두, 양말 ···. '벗기우고' '벗기우고' '벗기우고'. 시인님은 이렇게 속세에서의 갖가지 장식을 모두 벗고 처음 세상에 왔던 상태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시간을 떨어뜨리고'. 죽음의 세계에는 시간이 필요 없겠지요? 내일 만나자, 몇시에 보자, 한 시간 안에 해야한다, 이런 시간을 초월한 세계이겠지요? 이렇게 죽음은 언제나 자신을 따라다니며 옭아매던 세속의 시간과의 결별입니다.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튀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이 시에서 가장 높은 우듬지이네요. 

 

그렇게 '나'는 바람 속에 말려 흩어져 완전히 소멸되고 말까요? '바람 속에 익은'이라는 구절은 '살을 말리게 해다오'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라는 구절을 도드라지게 합니다. 시인님은 바람 속에 흩어진 육신은 '붉은 열매'가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그건 소멸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는 일이네요. 자연으로 돌아가면 자신이 '붉은 열매'의 일부가 되었더라도 아무 인연도 없는 듯 '무연히' 바라볼 수 있게 되겠지요?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이 구절은 한 장의 현장 스냅 사진인 것만 같습니다. 입이 쩍 벌어진 해골, 그 어금니에 박힌 백금 조각이 햇빛 속에서 반짝거리는 장면 말입니다.

 

이런 장면을 상상하고 있는 시인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죽음과 익숙해지기 놀이를 하는 중인 것만 같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죽음의 과정을 구체화하여 삶의 현장에 풀어놓으며 시인님은 죽음을 가깝게 사귀고 있는 중인 것만 같네요.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 바람과 놀게 해다오'

 

그렇게 풀을 깔고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초분(草墳) 속에 누워 있으면 벌레들도, 새들도, 크고 작은 짐승들도 다녀가겠지요. 나의 피와 살은 그들의 피가 되고 살이 되겠지요. 그렇게 초분에 누워 한동안 바람과 놀다보면 하얀 뼈만 남게 되겠네요. 그것은 세상을 활보하며 권세와 부의 욕망에 휘둘리며 가슴 졸이던 나의 다른 형상이겠지요?

 

시인님은 그렇게 하얀 뼈로 변한 자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삶 속에서 말입니다. 삶 속에서 죽음을 직시하고 이해하면서 삶을 직시하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헤아리고 있습니다. 그런 후의 삶은 그 전의 삶과 다른 삶이겠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황동규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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