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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윤선도 시조 만흥

by 빗방울이네 2024.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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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 시인님의 시조 '만흥 1, 2'를 만납니다. 속세를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소박하게 살아가는 이의 유유자적을 노래한 시조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윤선도 시조 '만흥 1, 2' 읽기

 

만흥(漫興)

 

윤선도(1587~1671, 본관 전남 해남, 서울 출생)

 

1

 

산수 간 바위 아래 띳집을 짓노라 하니

그 모르는 남들은 웃는다 한다마는

어리석고 향암(鄕闇)의 뜻에는 내 분(分)인가 하노라.

 

2

 

보리밥 풋나물을 알맞게 먹은 후에

바위 끝 물가에 실컷 노니노라

그 밖의 여남은 일이야 부러워할 줄 있으랴.

 

▷「윤선도 시조집」(윤선도 지음, 김용찬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6년) 중에서

 

고산 윤선도 님(1587~1671)은 조선시대 문신이자 시인입니다. 본관은 해남이며 서울 출생, 호는 고산.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 공조좌랑, 예조정랑, 성산현감 등의 벼슬을 했지만, 치열한 정쟁 속에 일생의 과반을 관직보다는 함경도 경원·삼수, 경상도 기장·영덕, 전라도 광양·보길도·해남 등 유배지와 은거지에서 살았습니다. 경사(經史)에 해박했고 의약과 복서 및 지리 등에도 널리 통했다고 합니다. 저서로는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으며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 75수의 시조를 남겼습니다. 

 

2. 산전수전 다 겪은 56세 시인의 은둔생활은?

 

조선시대 치열한 정쟁 속에 살아야했던 고산 윤선도 시인님의 삶은 참으로 파란만장하네요.

 

26세에 진사에 급제한 이후 42세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함경도 경원 유배 → 경상도 기장 이배→ 해배 후 해남에 기거합니다. 한창 혈기왕성한 시절을 유배지에서 보내야 했네요.

 

그 후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42세), 공조좌랑(43세), 성산현감(48세)으로 관직에 있었지만, 49세 때 성산현감을 사임하고 귀향한 이후로는 줄곧 유배와 은거생활이 이어집니다.

 

성산현감을 사임하고 귀향한 다음 해(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이 발발합니다. 그래서 시인님은 가족을 배에 태우고 강화도로 진군했으나 강화도 함락과 치욕적인 항복소식을 접하고 세상을 등질 생각으로 보길도로 내려와 은거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 되었네요. 강화도까지 와서 임금을 알현하지 않은 죄로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52세)되었다 해배(53세)되는 곡절을 겪었네요.

 

53세 때부터  본격적인 은둔생활이 시작되는데요, 그때 해남 근처 금쇄동에서 자연과 더불어 지내면서 56세 때 쓴 연작 시조가 「산중신곡」입니다.

 

이 「산중신곡」의 맨 앞에 실린 시조가 '만흥'입니다. '만흥'은 모두 6수로 되어 있는데, 오늘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작품을 만나봅니다.

 

그즈음 질곡의 시간 속에서 시인님의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쳤을 것만 같습니다. 번잡한 세상 일을 떠나 금쇄동 산속에서의 삶은 어땠을까요?

 

제목 '만흥(漫興)'은 질펀할 '漫(만)'과 흥취 '興(흥)'입니다. 뜻은 '저절로 일어나는 흥취'를 말합니다. 

 

'산수 간 바위 아래 띳집을 짓노라 하니 / 그 모르는 남들은 웃는다 한다마는 / 어리석고 향암(鄕闇)의 뜻에는 내 분(分)인가 하노라'

 

'띳집'은 띠로 지붕을 올린 집입니다. 띠는 볏과의 여러해살이 풀. 띠집은 띠나 짚이나 갈대로 지붕을 이은 초가집으로 새깁니다.

 

산속에 경치 좋은 곳 바위 아래에 그런 띠집을 짓는다고 하니 남들이 웃는다고 하네요.

 

벼슬까지 하던 한양 양반이 왜 이런 산골에 들어와 띠집을 짓고 사노! 하면서 사람들이 수군대었겠지요?

 

시인님은 막 유배에서 풀려났던 53세 때 아들까지 잃게 되는 상명지통(喪明之痛)의 슬픔을 겪게 됩니다.

 

정쟁 속에서 휘말리고 또 자식까지 잃게 된 시인님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참으로 세상의 것 다 버리고 세상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외진 구석으로 숨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향암(鄕闇)', 시골 '鄕(향)' 어두울 '闇(암)'인데, 시골에서 지내 온갖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시인님은 스스로 세상 일일랑은 아무것도 모르는 '향암(鄕闇)'임을 자처하네요. 그것이 자신의 처지에 맞는 한도, 즉 '분(分)'이라고 하네요. 유유자적한 자유로움, 그리고 속에 스며있는 아픔도 느껴집니다.

 

"보리밥-풋나물을"-윤선도-시조-'만흥'-중에서.
"보리밥 풋나물을" - 윤선도 시조 '만흥' 중에서.

 

 

 

 

 

 

3. '보리밥 풋나물을 알맞게 먹은 후에'

 

'보리밥 풋나물을 알맞게 먹은 후에 / 바위 끝 물가에 실컷 노니노라 / 그 밖의 여남은 일이야 부러워할 줄 있으랴'

 

'만흥(漫興)'의 두 번째 시조입니다. 

 

'알맞게 먹은 후에'가 가장 먼저 눈에 띕니다. 실컷 먹지 않고 '알맞게' 먹었다는 말에서 절제의 자세가 엿보이네요. 허기를 달래는 정도로 적당히 먹는다는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알맞게'는 원문에는 '알마초'입니다. '알마초'라는 옛말도 참 멋지네요.

 

부귀영화를 쫓는 일에는 얼마나 많은 괴로움을 동반하는지요. 권세와 부를 따르는 일을 훌훌 털어버리고 산속에 내려와 기름진 음식 대신에 '보리밥 풋나물'이라는 소박한 음식에 만족하는 여유로운 삶이네요.

 

'실컷 노니노라'. 앞에서 먹는 일은 '알맞게 먹은 후에'였는데, 이 행에서 노는 일은 '실컷' 논다고 하네요. '알맞게'와 '실컷'의 대조가 흥미롭습니다. '실컷'은 원본에 '슬카('ㅋ' 아래 '·')지'로 나옵니다. '실컷'의 옛말 '슬카지'도 고운 말이네요. 

 

'그 밖의 여남은 일'. 원본에는 '그 나믄 녀나믄 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남은 여남은 일'이네요. '여남은'은 '열이 조금 넘는 수의'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 몇 가지 일들이란 세속의 일들입니다. 조정의 일들이겠지요. 명예와 부를 따르는 일이겠네요. 

 

보리밥 풋나물을 알맞게 먹고 바위 끝을 왔다 갔다 하면서 실컷 거닐고 있는 시인님은 저절로 일어나는 흥취, 즉 '만흥(漫興)'으로 속세의 여남은 일은 하나도 부럽지 않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이렇게 자연 속에 파묻혀 지내는 삶을 즐기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며 자족하려는 마음이 담겨있는 시입니다. 그렇지만 멀리 조정의 일에 자꾸 신경이 쓰였을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이 시조에서 이제 더 이상 명리(名利)에 따르는 삶을 살지 않겠노라는 다짐이 느껴지기도 하네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아름다운 옛시조를 더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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