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시인님의 시 '매화꽃 2'를 만납니다. 어서 매화나무 아래로 달려가 킁킁거리며 매화꽃 냄새를 맡아보고 싶어지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황동규 시 '매화꽃 2' 읽기
매화꽃 2
황동규(1938년~ , 서울)
묏비(山雨) 막 개인 다음
되살아나는 매화꽃 냄새
깊이 마시면
머릿속 해골이 환해진다.
안구(眼球) 근처가 더 환해진다.
잠시 환등 켜진 것처럼
꺼져도 한참 환한 환등처럼.
▷ 황동규 시집 「몰운대행」(문학과지성사, 1991년) 중에서
2. '머릿속 해골이 환해지는' 매화꽃 냄새
묏비(山雨) 막 개인 다음 / 되살아나는 매화꽃 냄새
▷ 황동규 시 '매화꽃 2' 중에서
'묏비(山雨)'. 산비, 산에 내리는 비를 옛말로 '묏비'라고 했네요. 고풍스러운 '묏비'는 고풍스러운 매화꽃과 잘 어울리네요.
산비가 그쳤을 때 시인님은 산에 있었네요. 매화나무 아래를 어슬렁거리게 되었을까요? 비에 젖어 잠겨있던 '매화꽃 냄새'가 되살아난다고 합니다. 어떤 냄새였을까요?
깊이 마시면 / 머릿속 해골이 환해진다 / 안구(眼球) 근처가 더 환해진다
▷ 황동규 시 '매화꽃 2' 중에서
'깊이 마시면'. 매화나무 아래에서 '매화꽃 냄새'를 맡으려 킁킁거리고 있는 시인님 좀 보셔요. 그 냄새, 조금이라도 더 마셔보려고 깊이 마신다고 하네요. 시인님, 그게 무슨 보약이라도 되나요?
'머릿속 해골이 환해진다'. 맞네요. 이럴 정도면 그 냄새, 보약이네요. 그런데요, '매화꽃 냄새'로 '해골이 환해진다'는 구절, 지금껏 들어본 적 있나요? 아니, 고상한 시에서, 그것도 매화꽃 냄새를 영접하는 향기로운 시에서 으스스한 해골이 왜 나오냐고요?
이건 시인님의 전략인 것만 같습니다. 해골이 다 시원하네! 우리 가끔 이런 문장 쓰잖아요. 친한 사이에서요. 시인님이 우리의 일상에서 쓰는 말, 해골이 환해진다고 하니, 시인님과 우리 꽤 친해진 느낌이 드네요.
누구도 이런 매꼼한 자리에서 꺼내지 않는 해골, 그러나 누구나 언제나 들고 다니는 해골이 시에 쑥 등장해 우리는 모골이 송연한 나머지 시에 온 신경을 집중하게 되었네요. '해골'이라는 시어는 이 시를 부풀게 하는 이스트 같은 존재네요.
시인님이 과감하게 등장시킨 '해골' 덕분에 '매화꽃 냄새'를 깊이 마셨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지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구(眼球) 근처가 더 환해진다'. 맛있는 거 먹고 배를 채우고 나면 눈앞에 환해지는 그런 느낌이겠지요?
이렇게 시인님은 가끔 해골을 참 잘 꺼내 쓰십니다. 잠시 시인님의 다른 '해골 시' 읽어볼까요?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하나 만들기 위해 / 쉰다섯 여름과 겨울 / 그 헐렁한 길을 / 맨머리에 눈비 맞으며 헤매다녔노니
▷ 황동규 시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중에서
시인님을 생각하면 시인님의 해골이 먼저 떠오를 것 같네요. 평소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시인님의 '해골'이 '매화꽃 냄새'로 인해 ‘미소 환하게 짓고 있는’ 해골이 되었을 것 같네요.
잠시 환등 켜진 것처럼 / 꺼져도 한참 환한 환등처럼.
▷ 황동규 시 '매화꽃 2' 중에서
'매화꽃 냄새'가 몸속에 등을 켰네요. 안구 근처에요. 매화꽃 냄새에 '탁' 하고 안구 근처에 불이 켜지는 맑은 몸을 가진 시인님이네요. 그 매화꽃 냄새가 켠 불은 한참 환하다고 합니다.
그 환한 불빛 잡아두려고, '해골' 계속 환해지려고, '안구 근처' 계속 환해지려고 뒷짐 지고 매화나무 아래를 어슬렁거리며 코를 흠흠거리는 시인님이 보이는 것만 같네요. 시인님, 그 풍경 생각만 해도 ‘머릿속 해골’이 환합니다!
3. 매화나무 아래서 매화꽃 냄새와 숨바꼭질하다
황동규 시인님의 시 '매화꽃 2'를 읽자마자 빗방울이네도 매화나무 아래로 달려가보았습니다. 집 뒷산 저만의 꽃대궐에요. 거기에 20여 그루의 매화나무가 줄지어 있는 매화 오솔길이 있거든요. 꽃이 막 피기 시작한 햇매화꽃 터널이에요.
시인님처럼 매화나무 아래서 숨을 들이키며 '매화꽃 냄새'를 깊이 마셔봅니다.
아, 향 좋네요.
시 '매화꽃 2'를 읽고 나서라서 그런지, 늘 달고 다니나 그동안 안 보이던 해골이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그 해골이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은 아니고요, 좀 찡그린 해골인 것만 같네요. 그런 해골이라도 조금이나마 환해져보려 깊이 깊이 공기를 마셔봅니다. 이곳 매화꽃 냄새는 강하지는 않은데 정신을 아득하게 하는 맛이 있는 향입니다.
아, 그런데 어느 순간 매화꽃 냄새가 사라져 버렸네요. 코가 냄새에 익숙해져서일까요?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서일까요? 아니면 느닷없는 불청객의 방문에 놀란 매화꽃들이 일순 숨을 멈추어버렸을까요?
그래서 까치발을 하고서는 매화꽃에 바짝 다가가 코를 들이밀었지요. 여기서 이렇게 들이대면 아니 되옵니다. 매화꽃들은 빗방울이네의 저돌적인 접근에 참말로 숨을 꾹 참고 있는지 매화꽃 냄새가 하나도 나지 않았답니다.
빗방울이네도 적이 민망하여 한걸음 뒤로 물러났습니다. 내 가까이 가지 않을 테니 해골 환하게 해주는 그대의 향을 부디 다시 뿜어다오. 다시 매화나무 아래를 어슬렁거리며 시계추처럼 몸을 천천히 좌우로 흔들어 보았어요. 왼쪽으로 기울어질 때 냄새가 나기도 했다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질 때 나기도 했다가 하였지요. 이렇게 매화꽃 냄새와 숨바꼭질하며 해골이 환해졌다 깜깜해졌다 하던 오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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