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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 택배 슬픔이 택배로 왔다

by 빗방울이네 2023.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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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님의 시 ‘택배’가 왔습니다. 이 택배 속엔 무엇이 들어있을까요? 시인님이 퍼올린 사유의 우물물로 마음을 맑히며 함께 독서 목욕을 하십시다.

1. 정호승 시 ‘택배’ 읽기


택배

- 정호승

슬픔이 택배로 왔다
누가 보냈는지 모른다
보낸 사람 이름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다
서둘러 슬픔의 박스와 포장지를 벗긴다
벗겨도 벗겨도 슬픔은 나오지 않는다
누가 보낸 슬픔의 제품이길래
얼마나 아름다운 슬픔이길래
사랑을 잃고 두 눈이 멀어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나에게 배송돼 왔나
포장된 슬픔은 나를 슬프게 한다
살아갈 날보다 죽어갈 날이 더 많은 나에게
택배로 온 슬픔이여
슬픔의 포장지를 스스로 벗고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나에게만은
슬픔의 진실된 얼굴을 보여다오
마지막 한방울 눈물이 남을 때까지
얼어붙은 슬픔을 택배로 보내고
누가 저 눈길 위에서 울고 있는지
그를 찾아 눈길을 걸어가야 한다

- 정호승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창비) 중에서


정호승 시인님은 1950년 경남 하동 출신으로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이 각각 당선돼 등단했습니다.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등이 있습니다.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 「수선화에게」 등, 산문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등, 동시집 「참새」, 어른을 위한 동화집 「항아리」 등, 우화소설집 「산산조각」 등이 있습니다.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택배로 온 것은 무엇일까요?


빗방울이네도 ‘택배’ 좋아합니다. 참 좋아합니다.

풀잎님, 오늘은 어떤 소소한 기쁨이 우리집에 도착하나요? 몇시에 도착하나요?

빗방울이네는 가끔 이렇게 짝지 풀잎에게 물어봅니다. 오늘 택배 오는 거 뭐 있냐고요. 인터넷을 통해 제품을 신청하고 그 택배를 기다리는 시간은 몽글몽글합니다. 우연히 어디서 좋은 책을 발견해 주문한 뒤라면 하루에 두어번 현관을 나가보기도 하고요.

그런데요, 정호승 시인님처럼 ‘슬픔’이 택배로 온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보았네요. 

2022년 9월에 나온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는 1972년 등단한 시인님의 등단 50주년 기념 시집이고, 신작 시집으로는 14번째 시집입니다. 시집 제목은 오늘 읽는 시 ’택배‘의 첫줄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 시에 대한 시인님의 애정이 크다는 눈짓인 것 같네요. 첫줄을 다시 보시죠.
 
슬픔이 택배로 왔다

- 정호승 시 '택배' 중에서

 
이 첫줄이 이 시의 솟대입니다. 우리는 이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참신하고도 의아한 첫줄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시 속으로 빨려들게 되어 있었네요.
 
택배로 슬픔이 왔다고? 택배로 오는 슬픔이란 무얼 말하는 걸까, 하면서요. 
 
정호승 시인님은 지난 2022년 11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나와 진행자와 대담을 나눈 적이 있는데요, 그때 이 시를 이야기했습니다.
 
그 슬픔이라는 택배는 이별이라는 제품이다.
그것도 죽음을 통한 이별이라는 택배가 나에게 배송되어 왔다 ···
결국 인간은 누구나 단 한 번은 죽음이라는, 이별이라는 슬픔의 택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런 시를 한번 썼습니다.

시인님은 죽음의 도착을 상상하고 있었네요. 택배처럼 오는 죽음 말이에요. 택배 상자를 보니 이렇습니다. 

누가 보냈는지 모른다 / 보낸 사람 이름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다

- 정호승 시 ‘택배’ 중에서

 
그러니 반송 불가입니다. 이를 어쩌나요? 세상에 죽음을 누가 반송할 수 있겠는지요? 

정호승시택배중에서
정호승 시 '택배' 중에서

 

 

3. 누구에게나 언젠가 오는 검은 택배여!


서둘러 슬픔의 박스와 포장지를 벗긴다 / 벗겨도 벗겨도 슬픔은 나오지 않는다
- 정호승 시 '택배' 중에서
 
시인님은 지금 꿈을 꾸는 걸까요? 꿈 속에서 택배 상자를 받은, 올해(2023년) 73세의 시인님은 허둥거리며 택배 상자를 개봉하고 있습니다. 가위에 눌린 듯 땀을 뻘뻘 흘리며 기함을 지르며 어두운 심연 같은 택배 상자를 여는 시인님이 보이는 것만 같네요. 

사랑을 잃고 두 눈이 멀어 /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나에게 배송돼 왔나

- 정호승 시 ‘택배’ 중에서


이 검은 슬픔의 택배는 사람을 가리지 않네요. 이렇게 간당간당 살아가는 이에게도, 누구에게라도 언제라도 인정사정 없이 도착하네요. 시인님, 이를 어쩌면 좋은지요? 대답해주셔요!

시인님은 이 시 ‘택배’를 통해 이렇게 대답하는 것만 같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가라고요. 죽음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병자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일상의 일이라고요. 어느날 불쑥 '택배 도착했습니다', 하듯 현관문을 두드리듯 오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시인님은 오늘날 우리의 일상화된 택배라는 문화에 기대어 '죽음'이라는 화두를 우리 손에 슬며시 건네주신 거네요.
 
살아갈 날보다 죽어갈 날이 더 많은 나에게
- 정호승 시 '택배' 중에서
 
삶의 유한성은 '살아갈 날'의 소중함을 환기시켜 줍니다. 삶은 죽음과 동떨어져 저혼자 자유롭게 훨훨 날고 있는 듯 보여도 우리는 언젠가 대지 위에 내려앉을 수밖에 없는 숙명의 눈송이인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이 얼마나 확실한 일을 그 얼마나 모른 체 하고 사는지요?
 
시 '택배'를 읽으니 '살아갈 날'들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게 되네요. 이런, 택배가 올 때마다 생각하게 될 지도요. 그래도 너무 우울해하지 않기예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정호승 시인님의 시 한 편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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