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달진 시인님의 시 '체념'을 만납니다. 체념이라는 단어에서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그 생각만이 맞을까요? 시인님이 건네주는 깨달음의 향기로 마음을 맑히며 함께 독서 목욕을 하십시다.
1. 김달진 시 '체념' 읽기
체념(諦念)
- 김달진
봄 안개 자욱히 나린
밤 거리 가등(街燈)은 서러워 서러워
깊은 설움을 눈물처럼 머금었다.
마음을 앓은 너의 아스라한 눈동자는
빛나는 웃음보다 아름다워라.
몰려가고 오는 사람 구름처럼 흐르고,
청춘(靑春)도 노래도 바람처럼 흐르고,
오로지 먼 하늘가로 귀 기울이는 응시(凝視) -
혼자 정열의 등불을 다룰 뿐.
내 너 그림자 앞에 서노니, 먼 사람아
우리는 진정 비수(悲愁)에 사는 운명,
다채(多彩)로운 행복을 삼가하고
견디기보다 큰 괴롬이면
멀리 깊은 산(山) 구름 속에 들어가,
몰래 피었다 떨어지는 꽃잎을 주워
싸늘한 입술을 맞추어 보자.
- 「김달진 시전집 올빼미의 노래」(최동호 책임편집, 시인사, 1983) 중에서
김달진 시인님(호 월하, 1907~1989)은 경남 창원 출신으로 1929년 「문예공론」에 양주동 님의 선고(選考, 심사)로 등단했습니다. 「시원」 「시인부락」 「죽순」 등의 시 전문지 동인으로 활동했습니다. 금강산 유점사와 경남 백운산 등에 입산하여 수도생활을, 동아일보 기자 및 경북여고 교편생활을, 동양불교문화연구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1940년 첫 시집 「청시(靑柿)」 를 비롯하여 시선집 「올빼미의 노래」, 장편서사시 「큰 연꽃 한 송이 피기까지」, 선시집 「한 벌 옷에 바리때 하나」, 수상집 「산거일기」 , 번역서 「법구경」 「장자」 등이 있습니다.
2. '체념'에 들어있는 또다른 뜻은?
우리는 평소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단어의 뜻에 경도된 나머지 간혹 발걸음이 휘청거릴 때가 있습니다.
오늘 읽을 시의 제목 '체념(諦念)'이 그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체념'은 아주 단념하는 것을 말할 때 쓰입니다.
그런데 이런 뜻으로 이 시를 읽으면, 우리는 시의 중심에 닿지 못하고 표류하게 될 지 모릅니다. 과연 어떤 뜻일까요?
위 책에 실린 연보에 따르면, 김달진 시인님은 1934년 유점사에서 득도(得度: 출가해서 승려가 됨)한 뒤부터 동아일보 기자가 된 1945년 사이 10년 넘게 수도생활을 하신 분이고, 삶의 후반기에는 동양고전과 불경 번역에 진력한 분입니다.
이런 이력을 바탕으로 우리는 이 시 제목 '체념'의 뜻이 사전에 나오는 '체념'의 뜻 '아주 단념하다' 말고, 또 다른 뜻인 '도리를 깨닫는 마음'이라는 시인님의 눈짓을 느낄 수 있겠네요.
'체념'의 체(諦)는 '살피다'는 뜻이 있고, '진실' '이치'라는 뜻도 있습니다. 붓다가 깨달은 진리가 '4성제(四聖諦)'인데, 이때 '諦'가 붙습니다. 이 글자는 '체'로도 '제'로도 읽힙니다.
인간에게 가장 커다란 체념은 죽음에 대한 체념일까요? 죽음을 체념하게 되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의 삶, 그것도 온갖 괴로움으로 점철된 삶을 바르게, 의미 있게,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도리를 깨닫는 길을 걷게 되는 걸까요?
이런저런 생각으로 다시 시를 읽어보니 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네요. 자, 시로 갑니다.
3. '몰래 피었다 떨어진 꽃잎에 입을 맞춰라!'
봄 안개 자욱히 나린 / 밤 거리 가등(街燈)은 서러워 서러워
- 김달진 시 '체념(諦念)' 읽기
연보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님은 일제강점기의 절망과 고통을 건너온 분입니다. 이 한 세상,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얼마나 고민하고 또 고민했겠는지요? 봄 안개가 자욱이 내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밤이네요. 그런 밤거리를 비추는 가로등도 먼 길 비추어 주지 못하네요. 이 암울하고 서러운 풍경 속을 시인님은 걸어가네요. 시인님의 모습은 저마다의 괴로움을 견디고 있는 우리네 모습인 것만 같습니다.
마음을 앓은 너의 아스라한 눈동자는 / 빛나는 웃음보다 아름다워라
- 김달진 시 '체념(諦念)' 읽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바른 길인지, 진리를 찾기 위해 구도(求道)의 길을 가는 시인님의 아름다운 눈동자, '깊은 설움을 눈물처럼 머금은' 촉촉한 눈동자가 보이는 것만 같네요. 여기서 잠깐 이 시가 든 시집의 맨 마지막 쪽에 '뒷말'로 썼던 시인님의 전언을 듣겠습니다.
안과 밖에 함께 칠같이 어두운 밤에 혼자 나와 우는 올빼미의 노래 ···
슬픔인가 하면 기쁨이요, 고독인가 하면 법열(法悅)이요,
체념(諦念)인가 하면 초조(焦燥)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아직 밝아오는 새벽 이전의 노래가 이 올빼미의 노래입니다.
- 김달진 시집 「올빼미의 노래」 에서 시인이 쓴 '뒷말' 중에서(1950년 당시 미간행본으로 시인 소장)
이렇게 시인님은 치열하게 깨달음의 길을 찾고 있었네요. 현실의 괴로움을 벗고 빛나는 진리의 길을 찾고 있었네요. 시인님, 우리도 그 길을 가고 싶습니다, 부디 가르쳐 주셔요!
견디기보다 큰 괴롬이면 / 멀리 깊은 산(山) 구름 속에 들어가
- 김달진 시 '체념(諦念)' 읽기
그렇게 힘든 괴로움을 견뎌낼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합니다. 견딜 수 없는 큰 괴로움이면 멀리 깊은 산에 들어가라고 하네요. 거기서 무얼 하라는 걸까요?
몰래 피었다 떨어지는 꽃잎을 주워 / 싸늘한 입술을 맞추어 보자
- 김달진 시 '체념(諦念)' 읽기
이 시의 솟대는 이 마지막 연입니다. 몰래 피었다 떨어지는 꽃잎에 입을 맞추라고 합니다.
몰래 피었다 떨어지는 꽃잎을 생각합니다.
깊고 깊은 산속인데요, 구름이 머물다가는 높은 산속인데요, 그래서 더욱 아무도 없네요.
그래도 꽃잎은 한 바퀴 삶을 잘 살았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말입니다.
그 꽃잎이 하염없이 떨어지고 있네요.
이름도 없고 명예도 없고 권력도 돈도 없지만, 자신의 '열매'를 조용히 맺어놓고 말입니다.
그만하면 자신의 일 다했다는 듯이 말입니다.
시인님은 그 꽃잎의 삶을 생각하며 꽃잎에 싸늘한 입술을 맞추라고 하네요.
이 순간이 바로 '체념(諦念)'이겠네요. 바로 '도리를 깨닫는 마음'!
이런 마음에서라면 세속의 욕망, '다채로운 행복'이란 얼마나 뜬구름 같은 것이겠는지요? 이 얼마나 가볍고 환한 마음이겠는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삶의 고독을 노래한 시 한 편을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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