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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복 시 봄비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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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복 시인님의 시 '봄비'를 맞습니다. 맑고 곱고 깨끗한 시, 봄비처럼 정갈한 시입니다. 이수복 시인님이 불러온 봄비에 젖으며 마음을 씻으며 독서목욕을 해보십시다.
 

1. 이수복 시 '봄비' 읽기

 
봄비
 
- 이수복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에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 이수복 전집 「봄비와 낮달」(광주광역시문인협회 엮음, 예원) 중에서

 
이수복 시인님(1924~1986)은 전남 함평 출신으로 1954년 「문예」에 서정주 시인님에 의해 첫 작품 '동백꽃'이 추천된 이후 1955년 「현대문학」에 '실솔' '봄비'가 잇따라 추천되어 등단하였습니다. 1968년 첫 시집 「봄비」를 발간했고, 광주 수피아여학교 등에서 평생 교직에 머물다가 1986년 타계했습니다. 1955년 전라남도문화상, 1957년 현대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했습니다.
 

2. 봄비 오면 저절로 나오는 시

 
참 멋진 일입니다. 봄에 비만 오면 줄줄 입에서 시가 흘러나오니까요. 하늘에서 봄비 내리듯이요. '봄비'는 참말로 국민 애송시입니다.
 
이 비 그치면 /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

- 이수복 시 '봄비' 중에서

 
다른 구절은 몰라도 위 구절만큼은 술술 읊는 이가 많습니다. 이 시가 1970년대 이후 중고등학교 국어, 문학, 한문 교과서에 실려 학생들이 달달 외웠던 덕분일 것입니다.
 
그렇게 외웠던 시가 이렇게 정갈한 정서를 담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이 맑고 깨끗하고 밝은 시를 읽었던 이들이 그런 정서에 푹 젖을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요. 그만큼 맑고 깨끗하고 밝아졌을 테니까요.
 
빗방울이네는 이 시에서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이라는 구절이 참 좋습니다. 이수복 시인님은 이 구절에서 '내 마음'과 '강나루 긴 언덕'을 나란히 배치해 '내 마음'이 '강나루 긴 언덕'이고, '강나루 긴 언덕'이 '내 마음'이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는 얼마나 찬연한지요.

 

이 구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풀빛이 점점 짙어지면서 마음을 물들여 반갑고 또 서러워지는 느낌이 일어납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드디어 만나게 되면 너무 반가운 나머지 콧등이 시큰하면서 어쩐지 서럽지 않습디까?

 

봄에 내리는 비는 조용하고 가늘게 내립니다. 연하디 연한 꽃잎 행여 다칠세라요. 새 생명 깨어나라고 재촉하고 응원하는 비입니다. 그래서 풀빛이 짙어지고 보리밭 하늘엔 종달새가 지껄이고 꽃은 앞다투어 피어나겠네요.


임 앞에 타오르는 / 향연(香煙)과 같이 /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 이수복 시 '봄비' 중에서


이 비가 그치면 땅에선 아지랑이가 올라온다고 합니다. 그 모양이 '향연(香煙)'과 같다고 하네요. 이 마지막 4연으로 이 시의 뜻이 매우 깊어졌습니다. '향연(香煙)'은 향을 피우는 연기입니다. 임은 누구일까요? 빗방울이네는 우주의 섭리를 관장하거나 상징하는 우주적인 존재인 것만 같습니다. 이리하여 '봄비'가 그렇게 온 우주를 일깨우고 있네요. 그러므로 지친 우리도 깨어나겠지요. 짙어지는 풀처럼, 맑은 하늘의 종달새처럼, 벙글어지는 꽃처럼요. 
 

이수복시봄비중에서
이수복 시 '봄비' 중에서

 

 

3. 숨어사는 별처럼 겸손한 시인의 시

 
시 '봄비'를 쓴 이수복 시인님은 아주 섬세하고 온화하며 고운 마음을 가졌을 것만 같습니다. 이 '봄비' 하나로 빛나는 시의 역사가 된 시인님은 많은 시를 발표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시가 실린 그의 첫 시집 「봄비」는 등단 후 15년이 다 되어 나왔습니다. 그것도 발표에 고심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1968년에 나온 시집 「봄비」 영인본을 찾아보았습니다. 이수복 시인님은 시집 '후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이 34편을 참으로 아쉽게 골랐다. 이들 중 나를 격려해 주기 위해서 미당 선생께서 추천해 주신 세 편(동백꽃, 실솔, 봄비)의 시작(詩作) 말고는 나머지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자신을 가질 수가 없어 불안한 것뿐이다.
 
참 겸손한 말씀입니다. 또 이 시집 앞에는 조연현 문학평론가님의 글이 실려있네요. 이수복 시인님의 성정을 알 수 있는 글입니다.
 
그(이수복)의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그의 작품은 항상 특별한 주목을 받아왔으나 그는 늘 숨어 사는 별처럼 겸손하기만 했다. (중략) 섬세한 감성이 한국적인 정감을 통하여 형성된 그 조용한 정신의 능력에 나의 우둔한 감성은 언제나 놀라고 만다.
 
'조용한 정신의 능력'을 가진 이수복 시인님은 '숨어 사는 별처럼 겸손하다'라고 하네요. 그는 1986년 작고하기까지 32년 동안 113편의 작품만을 발표했는데요, 두 번째 시집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무결점주의를 지향한 그의 치열한 시 정신이 느껴지네요.
 
이수복의 죽음은 봄비처럼 조용하였다. 그는 기독교 신자였지만 장례식은 교회가 아닌 방림동 허름한 자기 집에서 없는 듯 행해졌다. 그의 명성에 비해 조문객들도 별로 없었다. (중략) 생전 이수복의 생활은 그의 죽음처럼 아쉽고 조용한 것이었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시 쓰고 혼자 책 읽고 그리고 혼자 산책하는 것이 전부였다. 

- 이수복 전집 「봄비와 낮달」 중 범대순 글에서 

 
이렇게 세속의 온갖 영예에 무심하고 자신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서 촉촉한 '봄비' 한 편을 우리의 영혼에 각인시켜 두고 가신 그의 삶의 자세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는 봄비 오는 밤입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봄 시를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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