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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백석 시 비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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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인님의 시 '비'를 맞습니다. 단 두 줄짜리 시인데, 시인님은 과연 어떤 멋진 무대를 만들어 놓고, 우리에게 눈짓하고 있을까요? 함께 '비'를 맞으며 마음을 맑히며 독서 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비' 읽기

 


 
- 백석
 
아카시아들이 언제 힌 두레방석을 깔었나
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


- 초판 복원본 백석 시집 「사슴」(백석 지음, 소와다리 펴냄, 2016) 중에서


'시인들의 시인'으로 불리는 백석 시인님(1912~1996)의 시 '비'를 읽습니다.

 

이 시는 1935년 11월에 「조광」 1권 1호에 처음 발표됐고, 1936년 1월 발간된 백석 시인님의 첫 시집이자 유일한 시집으로 남은 「사슴」에 실렸습니다.

 

시집 「사슴」에는 모두 33편의 시들이 실렸는데요, 이 시 '비'와 '노루' '절간이 소 이야기' 등 3편이 각각 두 줄짜리로 가장 짧은 시입니다. 시 '비'는 어떤 시일까요?

 

2. 비 올 때마다 냄새가 왜 날까요?

 

그런데요, 시의 제목이 '비'인데 본문에는 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네요. 왜 제목이 '비'일까요? 우리 함께 이 '비'를 맞아봅시다.

 

두 번째 행이 아리송하게 느껴집니다. 이 행만 풀면 만사가 풀리게 될 것 같네요. 보시지요.

 

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

- 백석 시 '비' 중에서

 

'물쿤'은 부사 '물큰'의 평북 사투리로 냄새 따위가 한꺼번에 확 풍기는 모양을 말합니다. '개비린내'가 확 풍긴다는 말이네요. 개의 비린내를 맡은 적이 있는지요? 비가 오면 털이 젖은 개에게서 나는 냄새, 개의 체온에 실려 풍기는 비릿한 냄새입니다. 비린내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습니다. '날콩이나 물고기, 동물의 피 따위에서 나는 역겹고 매스꺼운 냄새'.

 

어디서부터 오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물큰 하고 개비린내가 '온다'라고 합니다. '온다'는 진술에서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지네요. 시를 읽는 우리가 막 풍겨오는 개비린내를 맡고 있는 듯하네요.

 

자, 그런데 이 개비린내가 비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거실 창을 여니 바로 봄밤 / 하늘에 달무리가 선연하고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 비릿한 비 냄새

겨울난 화초들이 심호흡하며 / 냄새 맡기 분주하다

- 황동규 시 '봄밤' 중에서

 

우리가 이 블로그에서 함께 읽었던 황동규 시인님의 '봄밤'에 비의 비린내가 등장합니다. 과연 이 비릿한 비 냄새의 정체는 무얼까요?

 

KBS 라디오 <주진우 라이브> '과학과의 수다' 코너의 2023년 5월 3일 방송분에서 '비가 올 때마다 왜 냄새가 날까?'라는 주제를 다룬 적이 있어요. 

 

과학자들이 비 냄새의 원인이 궁금해서 조사해 보니, 비 자체에서는 그런 냄새 분자가 없었다고 하네요. 조사 결과, 흙속에 살고 있는 작은 미생물이 만든 냄새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 미생물이 바로 방선균이라는 세균인데, 이 녀석이 먹이를 먹고 부산물로 지오스민이라는 냄새 분자를 방출한다고 하네요. 

 

방선균은 맑은 날에는 건조해서 잘 증식하지 못하다가 비가 오기 전에 습도가 올라가면 굉장히 빠르게 증식해서 지오스민 분자를 많이 만들고, 에어로졸 상태의 빗물에 묻어서 우리 코로 잘 들어온다고 합니다. 비 냄새의 정체가 바로 이 지오스민이네요.

 

그런데요, 전남보건환경연구원의 '전남 유명 흙길의 지오스민 성분 연구'에 따르면, 방선균이 내는 지오스민은 초조함이나 불안감을 완화해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울증 치료에 효과가 있다네요. 지오스민은 낙엽이 썩어서 쌓인 토양의 위쪽에서 생성된다고 하네요. 뚜벅뚜벅 흙길을 걸으면 좋은 이유가 있었네요.

 

백석시비전문
백석 시 '비' 전문.

 

 

3. 아카시아꽃 두레방석에 앉고 싶네요

 

백석 시인님이 이 시를 썼던 1935년에는 이런 과학적인 사실을 몰랐겠지요?

 

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

- 백석 시 '비' 중에서

 

이 시에서는 아직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비 오기 직전, 습도가 충만한 상태네요. 그때 부엽토에 사는 방선균이 지오스민을 마구마구 방출하는 때네요.  


아카시아들이 언제 힌 두레방석을 깔었나

- 백석 시 '비' 중에서


이제야 우리는 1행으로 돌아왔습니다. '두레방석'은 짚이나 부들 따위로 둥글게 엮은 방석을 말합니다. 아카시아의 우윳빛 꽃송이들이 투두둑 떨어져 둥그레 쌓여 있는 장면이 눈에 훤히 보이죠?

 

백석 시인님의 어투를 상상하며 따라 해 봅니다. '아카시아들이 언제 힌 두레방석을 깔었나?' 몇 번 반복해서 발음해 보니, 이 문장은 '아카시아 꽃이 언제 이렇게 다 떨어져 버렸지?'라고 말하는 것만 같네요.

 

아카시아 꽃은 5월의 꽃입니다. 아카시아 꽃이 이렇게 다 떨어지면 이제 여름이 시작되는 거죠. 여름이 시작된다는 것은 비의 계절이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아카시아 꽃이 다 떨어져 버렸네, 이젠 비 오는 여름이네.' 이 평범한 문장이 이렇게 비범한 시로 탄생했네요.

 

아카시아들이 언제 힌 두레방석을 깔었나
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

- 백석 시 '비' 전문

 

우리의 예민한 백석 시인님은 어느 늦봄 아카시아를 지나가다 불현듯 비 냄새를 맡았고, 비가 오기 직전의 그 풍경을 단 두 줄의 문장으로 이리도 생생하게 그려주었네요. 그렇게 편안한 느낌을 주는 비 냄새(지오스민 분자)에 이끌려 우리는 백석 시인님이 깔아놓은 아카시아의 낙화더미(두레방석)에 퍼질러 앉고만 싶어지네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백석 시인님의 시 한 편을 더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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