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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김광섭 시 성북동 비둘기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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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 시인님의 시 '성북동 비둘기'를 만납니다. 쫓기는 새 비둘기를 보니 자꾸 우리도 슬퍼지네요. 함께 소리 내어 읽으며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광섭 시 '성북동 비둘기' 읽기

 
성북동 비둘기

-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산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 「이산 김광섭 시전집」(홍정선 책임 편집, 문학과지성사) 중에서


김광섭 시인님(1905~1977)은 함경북도 경성(鏡城) 출신으로 1927년 「해외문학」, 1931년 「문예월간」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공보비서관, 대한신문 및 세계일보 사장, 경희대 교수, 자유문협 위원장, 전국 문총(文總) 최고위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시집으로는 1939년 발간된 첫 시집 「동경(憧憬)」을 비롯, 「마음」 「해바라기」 「성북동 비둘기」 「반응」 등이 있습니다. 서울시문화상(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국민훈장 모란장, 예술원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우리도 의지할 데 없는 비둘기 아닌가요?

 
'성북동 비둘기'는 김광섭 시인님의 대표 시입니다. 1968년 「월간문학」  11월호에 처음 발표됐고, 시인님의 제4시집 「성북동 비둘기」에 수록된 시입니다. 시인님 나이 64세에 쓴 시네요. 시인님은 1965년 뇌출혈로 쓰러져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넘기면서 4~5년을 병상에 누워 지냈다고 합니다. 시인님의 와병 중에 쓰인 시네요.
 
이 시에 대한 시인님의 시작노트를 잠깐 읽어봅시다.

아침마다 정원에 앉아 명상하다가도 전쟁 같은 포성에 깜짝 놀라면서
물질문명에 쫓기는 비둘기의 비애를 가슴에 느끼곤 했다.
그것의 시화(詩化)다.

- 「김광섭 시와 인생에 대하여」(김광섭 지음, 한국기록연구소) 중에서


그랬네요. 투병 중이었던 시인님은 물질문명에 쫓기는 비둘기의 비애를 생각하면서 이 시를 썼네요. 시인님은 쫓기는 비둘기를 보면서 존재의 비애를 느꼈던 걸까요? 병으로 인해 삶에서 세상에서 점점 아득히 멀어지고 있는 자신의 운명을 투영한 것 같기도 하네요.

그래서인지 우리도 이 시 속에서 자꾸 우리 자신이 보이네요. 채석장이 새로 생기면서 그동안 정들었던 거처를 잃게된 비둘기를 보니 이 비둘기처럼 쫓기는 새가 된 우리 자신과 이웃들이 뚜렷이 보이네요.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 가슴에 금이 갔다

- 김광섭 시 '성북동 비둘기' 중에서


비둘기의 슬픔은 바로 인간의 슬픔이 아니겠는지요? 비둘기가 살지 못하는 곳에 어찌 인간이 살겠는지요? 산업화로 인해 보금자리를 빼앗긴 비둘기처럼 인간도 평화롭고 정답던 마음의 거주지를 잃고 있었네요. 문명화로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무한경쟁의 틈바구니에서 불안과 고독에 쫓기고 있는 건 아닌지요? 이 삭막하고 세속화된 현실 속에서 비둘기처럼 가슴에 멍이 든 채 말입니다.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 김광섭 시 '성북동 비둘기' 중에서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우리 마음의 고향을 파괴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래서 우리는 기댈 곳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고 하네요. 고독이나 절망은 이렇게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이네요.
 
 

김광섭시성북동비둘기중에서
김광섭 시 '성북동 비둘기' 중에서.

 

 

3. 쫓기는 생명의 불안과 고독에 대한 기록

 
그대는 '성북동 비둘기'의 어느 구절에 가슴을 데었는지요?

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 김광섭 시 '성북동 비둘기' 중에서


빗방울이네는 이 구절에 와서 눈가가 확 더웠습니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비둘기가 헤매고 헤매다가 이렇게 삭막한 채석장으로 다시 와서 방금 깬 돌의 온기에 입을 닦는다고 하네요. 방금 갈라진 돌에 온기가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지요? 이 살벌한 세상에서 의지할 데 없어 그런 희미한 온기에마나 시린 주둥이를 비비는 서글픈 비둘기 좀 보셔요.

시 '성북동 비둘기'는 무려 55년 전에 쓰인 시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쫓기는 방식은 더 진화되고 확대되고 일상화된 듯하네요. 현란한 스마트기기 앞에서, 미로처럼 복잡한 도심의 거리에서 방향 감각을 잃고 휘청거리던 시간들 말입니다. 패스트푸드점의 키오스크 앞에서 어리둥절하던 시간요. 시 쓰고 소설쓰는 AI까지요. 우리, 앞으로 나아간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도 사실은 얼마나 많이 밀려왔고 또 밀리겠는지요? 비둘기처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요.
 
채석장이 새로 생겨 몸과 마음 둘 곳을 잃고 방황하는 비둘기처럼 힘껏 날개짓해서 위로 날아올라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을 한바퀴 휘 돌고 싶은 심정이네요.
 
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 김광섭 시 '성북동 비둘기' 중에서


그래서 고독한 빗방울이네는, 외로운 비둘기는 온기를 찾기 어려운 차갑고 삭막하고 낯선 도시에서 방금 딴 돌에라도 주둥이를 비비고 싶은 심정 아니겠는지요? 참으로 애연한 장면이 아닐 수 없네요. 이를 어찌해야 할까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삶의 비의를 알려주는 시 한 편 더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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