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정 시인님의 시 '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를 읽습니다. 지치고 힘든 이를 위해, 외로운 이를 위해 시인님은 이 시를 처방전으로 건네줍니다. 함께 소리 내어 낭송하며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신석정 시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읽기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신석정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森林帶)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湖水)에 힌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야장미(野薔薇) 열매 붉어
멀리 노루 새끼 마음 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서요
나와 가치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山) 비탈 넌즈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힌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서요
그때 우리는 어린 양(羊)을 몰고 돌아옵니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五月)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나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가마귀 높이 날어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果樹園)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고 새빩안 임금(林檎)을 또옥똑 따지 않으렵니까?
- 「신석정 시선」(신석정 지음, 권선영 엮음, 지식을만드는지식) 중에서
신석정 시인님(1907~1974)은 전북 부안 출신으로 1924년 조선일보에 투고한 시 '기우는 해'가 활자화된 것을 계기로 여러 일간지에 시를 계속 투고·발표했고, 1930년 「시문학」 3호에 시 '선물'을 발표한 후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시집으로 1939년에 발간된 첫 시집 「촛불」을 비롯, 「슬픈 목가」 「빙하」 「산의 서곡」 「대바람 소리」 등과 유고 수필집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 등이 있습니다. 전라북도문화상(문학상), 한국문학상, 문화포장, 한국예술문화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원본으로 읽는 초판본 시의 맛은?
위 책 「신석정 시선」은 '초판본 한국 근현대시문학선집' 중의 한 권입니다. 이 선집의 발간 취지대로 시인님이 낸 초판본 시집, 즉 저본(底本)에 실린 표기 그대로 시를 수정 없이 타이핑해서 실은 책입니다.
이 고마운 책 덕분에 우리는 시인님이 처음 발표했을 때의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를 마주하며 음미할 수 있게 되었네요.
이 시에서 세 번이나 반복되는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라는 문장은 얼마나 정다운지요? '알으십니까?'라는 문법에 맞지 않는 시어는 '아십니까?' 또는 '알고 계십니까?' 보다 '더 다정한 올림체'라고 하면 어떨까요?
우리에게 '들장미'로 알려졌던 시어가 원본에는 '야장미'였네요. '야장미'는 찔레나무를 뜻합니다. 이 시의 초롱한 눈 같은 역할을 하는 '능금'이라는 시어도 저본에서는 '임금'으로 표기되었다는 점도 이채롭습니다. '임금'과 능금은 같은 말입니다.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세요'의 '마세요'가 저본에서는 '마서요'였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마서요'의 어감은 '마세요'보다 말하는 이의 자세가 더 낮고 정중하다는 느낌을 주네요.
3. 곱고 부드럽고 소박한 마음을 일으켜주는 시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는 대표적인 전원시(田園詩)로 꼽힙니다. 전원시는 전원(田園 ; 논밭과 동산), 즉 시골이나 교외의 생활과 정경을 읊은 시입니다. 전원시의 하나인 목가시(牧歌詩)는 전원의 한가로운 목자(牧子; 말이나 소를 키우는 사람)나 농부의 생활을 읊은 서정적인 시를 말하고요.
이 시로써 신석정 시인님에게는 전원시인, 목가시인이라는 이름표가 붙게 되었습니다. 신석정 시인님은 김동명·김상용 시인님과 함께 '3대 전원시인'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 시는 1939년에 발간된 신석정 시인님의 첫 시집 「촛불」에 실렸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쓰인 시네요. 그 암울한 현실 속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산수화 같은 공간을 상상 속에 구축해 두고 읊고 또 읊었겠네요.
숲(삼림대), 호수, 야장미열매, 노루새끼, 비둘기, 염소, 옥수수밭, 물소리, 어린 양, 비, 꿩 소리, 서리가마귀, 산국화, 노란 은행잎, 과수원, 꿀벌, 임금 ···
아, 이들은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그래서 잊어버린 것들이네요. 우리가 얼마나 좋아하는 것인지요? 그래서 이런 시어들이 엮어내는 미적 정조(情操)는 우리를 부드럽게 만지며 '마음 마사지'를 해주는 것만 같습니다. 이 시는 80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를 위로해 주는 안식처가 되어 주네요.
이 시는 눈으로 읽어도 좋지만, 목을 가다듬고 감정을 이입해서 소리를 내어 낭송을 하면 좋습니다. 그러면 드디어 마지막 연에 이르러 우리는 '나와 함께 고 새빩안 임금을 또옥똑 따지 않으렵니까?' 하면서, 연극 배우처럼 한껏 심취한 채로 '또옥똑' 하고 또박또박 발음할 즈음, 우리 손엔 붉은 능금 한 알이 쥐어져 있을 것만 같네요. 아, 향기롭네요.
글 읽고 마음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그대를 아주 특별한 치유의 공간으로 데려다주는 시 한 편을 더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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