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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백석 시 모닥불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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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백석 시인님의 시 「모닥불」 말입니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모닥불을 쬐는 것처럼 온몸이 훈훈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오늘 우리 둘러앉아 이 '모닥불'을 읽으며, 시의 모닥불을 함께 쬐며 마음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대표 시로 꼽힌 「모닥불」


모닥불

- 백석(1912~1995)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닢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 없는 서로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력사가 있다

- 「정본 백석 시집」(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중에서


어떻습니까? 좀 어렵다는 생각이 드시지요? 그런데 이 시를 천천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이 시에서 참으로 놀라운 삶의 비의(秘義)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모닥불'은 백석 시인님의 시집 「사슴」에 실린 시 33편 중에서 네번째로 등장합니다. 「사슴」은 1936년 백석 시인님이 25세 되던 해에 나왔습니다.

문학평론가 임화 시인님(1908~1953)은 1939년에 「현대조선시인선집」(학예사)을 엮으면서 '모닥불'을 백석의 대표작으로 뽑아 실었습니다. 그때 ‘예술적인 또는 정신적인 두 가지 의미에서’라고 '모닥불'이 대표작으로 선정됐다고 했습니다. 과연 이 ‘모닥불’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기에 예술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했을까요? 우리가 사랑하는 백석 시인님의 대표시라고 할만큼 말입니다.

2. 모닥불의 정체성은 무얼까요?


자, 우리 함께 시 속으로 들어가봅시다. ‘모닥불’은 모두 3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연마다 서로 다른 뚜렷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1연은 모닥불의 소재가 되는 사물들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시골 마을 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 이제 쓸모가 없게 된 것들, 그래서 버려진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찮은 것들이 타면서 따뜻한 모닥불을 만들어내고 있네요. 버려지는 것들이 이렇게 스스로를 태우면서 온기를 만들어내고 있네요!

시인은 "저렇게 사소한 사물들도 온기를 만들어 내는데, 지금 당신은 어떤 온기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하고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2연은 모닥불을 쬐는 생명들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소한 사물들이 만들어낸 온기를 지위가 높은 사람도 쬐고 낮은 사람도 쬐고, 나그네도 쬐고 주인도 쬐고, 심지어 개나 강아지도 쬡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모닥불의 소재가 된 사물들은 모닥불을 쬐는 생명들이 쓸모없다고 내버린 것입니다. 내버린 것이지만 한때는 그 생명의 일부이기도 했네요. 그러니까 생명이 자신의 일부를 태우면서 그 온기를 내고 또 주위에 나눠주고 있네요!

모닥불은어려서우리할아버지가어미아비없는서러운아이로불상하니도몽둥발이가된슬픈력사가있다백석시중에서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력사가 있다 - 백석 시 중에서

 

 

 

3. 할아버지가 모닥불, 할아버지 삶이 모닥불


그런데 3연에 이르러 평론가나 시인들도 자주 좌절하는지 각각의 아이디어를 내는 바람에 우리의 이해도 여러 갈래로 흩어지고 맙니다. 우리의 독해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이 한 개의 문장에 주어가 무려 4개입니다. 우리는 백석 시인님 특유의 비문(非文)의 늪에 빠졌습니다. 이 문장에서 우리를 어지럽게 하는 단어가 바로 몽둥발이입니다. 이는 사고나 질병으로 발가락이 없어져 몽둥이 같이 되어버린 발을 말합니다. 이 몽둥발이는 왜 등장했을까요?

 

저는 저의 블로그 이웃인 Jay.B.Lee님이 오늘 새벽 이 글에 보내주신 의견에 깊이 공감합니다. 할아버지는 엄동설한에도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어린 고아였습니다. 그래서 발에 동상이 걸려 감각이 마비된 나머지 뜨거운 줄도 모르고 모닥불을 쬐다가 그만 발가락을 잃어 뭉둥발이가 된 사연이, 바로 3연의 내용일 것이라는 의견이었습니다. 백석 시인님이 시에서 적은 대로 정말 ‘슬픈 역사’입니다.

 

모닥불을 몽당불이라고도 합니다. 몽당불은 유사한 발음의 몽둥발이를 시 속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러면서 시의 여백이 커지고 상상의 폭도 한층 넓어졌습니다. 우리가 2연에서 일으킨 생각 한 자락을 이 3연과 연결해봅시다. '생명들의 일부가 타서 생명들의 온기가 되는 것이 바로 모닥불'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할아버지는 고아였습니다. 실제로 몽당발이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어미 아비 없는 몽둥발이 신세였습니다. 백석 시인님은 할아버지의 기구한 삶을 생각하고 깊은 슬픔에 잠겼을 것입니다. 우리는 3연의 긴박한 분위기의 비문(非文)에서 백석 시인님의 흐트러진 호흡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모닥불은 할아버지 같습니다.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였던 할아버지는 몽둥발이입니다.' 모닥불 = 할아버지 = 몽둥발이 = 슬픈 역사!

고아였던 아이에게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겠는지요? 그 뜨겁고 아픈 사연이 할아버지의 삶(모닥불)이 되었겠습니다. 그리하여 할아버지의 많은 식구들은 할아버지의 ‘삶’을 쬐었겠지요? 그대는 지금 누구의 '삶'을 쬐고있는지요? 나는 지금 누구에게 온기를 나누어 주고 있는지요? 

 

글 읽고 마음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백석 시인님의 시를 더 읽고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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