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흥얼거렸습니다. 정호승 시인님의 '이별노래' 말입니다. 오늘 이 시를 포스팅하려고요. 가사의 의미도 생각해 보고 노래도 불러보는 가운데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한 나머지 나중에는 눈물이 다 날 뻔했지 뭡니까? 이 시로 함께 마음목욕을 해볼까요?
1. 노래가 된 정호승 님의 「이별노래」
이동원 가수님이 부른 '이별노래' 아시지요? 그 노랫말이 정호승 시인님의 시라는 사실도 알고 계시지요? 이 시를 천천히 음미하며 읽으면서 흥얼거려 보시죠.
이별노래
- 정호승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 정호승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비채) 중에서
이 시는 정 시인님이 20대 후반에 쓴 시입니다. '이별노래'라는 제목의 노래는 1984년 탄생했는데 그 이후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정 시인님은 언젠가 대학의 특강에서 이 시가 노래로 만들어진 사연을 들려주었습니다.
정 시인님 직장으로 당시 무명가수였던 이동원 님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때 이동원 님은 시 '이별노래'를 노래로 만들고 싶은데 어떤 조건이면 되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20대였던 정 시인님은 아무 조건도 없으니 좋은 노래를 만들어달라고만 했다 합니다. 이 노래는 크게 히트했고 무명의 이동원 님을 유명가수 반열에 올려주었습니다.
늘 모자를 눌러쓰고 시선을 내리깔면서 '이별노래'를 애절하게 부르던 음유시인 이동원 님이 생각나네요. 지난 2021년 고인이 되신 이동원 님의 잔잔하고 호소력 짙은 노랫소리가 곁에서 들리는 것 같은 밤입니다.
2. 역설과 반어의 애절함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저, 정말 오늘 하루 이 노래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화장실 수도꼭지를 크게 틀어놓고 양치질하면서 입 한 번 헹구고 노래 한 구절하고 또 한번 헹구고 다음 구절하고, 그랬습니다.(거울 보면서 폼은 왜 잡은 건지.)
그런데요, 이별노래라니요. 이별은 큰 슬픔일 텐데 노래라니요. 맞습니다. 시를 음미해 보니, 아시다시피 이건 '이별노래'가 아니었습니다. 지독한 '사랑노래'였습니다.
- 떠나는 그대 /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떠나더라도 조금 늦게 떠나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이 떠난 그대를 재빨리 쫓아가서 그대를 사랑하려 한다고 합니다. 너무 멀리 떠나버리면 내가 쫓아갈 수 없으니까요. 그래, 쫓아가서 어떻게 사랑하려 한다는 걸까요?
- 그대 떠나는 곳 / 내 먼저 떠나가서 /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 노을이 되리니
-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 별이 되리니
재빨리 쫓아가서, 떠나는 그대를 추월해서,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겠다고 하네요. 또한 그렇게 재빨리 쫓아가서는 밤에는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겠다고 하네요. 그게 어떻게 떠난 건가요? 거참.
결국 가지 말라는 이야기네요. 좋으면, 보내기 싫으면 "가지 마세요."라고 말해야지 왜 이럴까요?
정 시인님은 그 특강에서 "시는 역설과 반어로 표현되는 때가 많다. 이별노래지만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떠나지 마세요' 하는 것보다 '떠나세요. 그런데 조금만 늦게 떠나시면 안 될까요?'라는 표현이 더 강렬하게 느껴지네요. 그렇게 간절한 부탁을 듣고 누가 못 들은 척하며 휙 떠나갈 수 있을까요? 참말로.
3. 아프도록 아름다운 시
정말 예쁜 시였네요. 이렇게 아프도록 아름다운 시였네요. 정 시인님은 어떻게 이렇게 멋진 시를 쓰실 수 있을까요?
정 시인님은 그 특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시가 무엇인지는 열심히 알아가는 과정이다. '이렇게 하면 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과정 속에서 시가 나온다."고요.
1,000편 넘게 시를 쓴 대한민국 대표 시인의 겸손일 테지만, '이렇게 하면 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과정에서 시가 나온다는 정 시인님의 말씀이 아주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도 같습니다. '이별노래'도 그런 과정에서 탄생했겠습니다.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또 흥얼거려집니다. 완전 자동이네요. 이 일을 어쩌지요?
글 읽고 마음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정호승 님의 시 한 편 더 읽어 보세요.
'읽고 쓰고 스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태주 시 풀꽃·2 읽기 (34) | 2023.02.12 |
---|---|
모비딕 - 가슴 씻기 (19) | 2023.02.11 |
백석 시 모닥불 읽기 (28) | 2023.02.09 |
나태주 시 선물 읽기 (20) | 2023.02.08 |
정현종 시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읽기 (38) | 2023.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