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읽는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우리의 독서는 계속 진행 중이어서, 너무 멀리 가서 다시 돌아오기 어려워지기 전에, 오늘은 잠시 이 책의 맨 앞페이지로 갈까 합니다. 왜 돌아가야 할까요? 거기에는 아주 특별한 따뜻함이 있으니까요. 우리 함께 그 페이지에 풍덩 뛰어들어 마음목욕을 하십시다.
1. 왜 읽지 않는 명작일까요?
장편소설 「모비딕」은 세계 명작인데, 사람들이 실제로는 가장 읽지 않는 세계 명작의 하나로 꼽힙니다. 그만큼 읽기 어렵습니다. 이 책의 맨 앞부분도 독자들이 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자, 그대가 이 책의 앞표지를 호기롭게 열어젖힌다 해도 앞페이지의 '어원부'와 '문헌부'를 대면하면서 그만 맥이 탁 하고 풀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는 '이건 뭐지?' 하면서 독서의 계속 여부를 놓고 갈등하거나, 또한 호기롭게 책장을 탁 덮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소설에서 '어원부'와 '문헌부'라니! 도대체 기존 소설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하고 낯선 장치입니다. 우선 어원부는 'Whale'이라는 어원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 어원부는 2페이지쯤 되기 때문에 쓰윽 지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문헌부'가 난관입니다. 문헌부는 무려 79개의, 고래와 관련된 짧거나 긴 문장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자료로 수집된 이런 문장들이 대체 왜 소설에 있어야 하는지 처음 우리는 어리둥절하기만 합니다.
2. 어원부와 문헌부에 숨어있는 것
그런데 여기에는 아주 흥미로운 서술이 있습니다. 허먼 멜빌은 어원부 앞에 '가슴 질환으로 세상을 떠난 어느 중학교의 조교가 제공해 준 바에 의함'이라고 하더니, 문헌부 앞에는 '어느 사서 조수 대리가 제공한 바에 의함'이라고 써두었네요. 여기엔 어떤 특별한 사연이 있을까요? 우선 한번 읽어보시죠.
- 참으로 가련한 이 조수 대리 나리께서 두더지나 땅강아지처럼 무딘 솜씨로 애써 모은 이 자료는, 생각건대 지상에 있는 여러 궁정의 서고에서부터 노점에 이르기까지 온갖 곳을 휘저어 들추어 보고, 성속귀천(聖俗貴賤)을 불문, 책이란 책에서 고래와 관계가 있는 구절이면 무턱대고 모조리 수집한 것 같다. 따라서 독자들께서는 여기에 인용한 예문 중 아무리 권위가 있어 보이는 대목이 있더라도 이 뒤죽박죽인 고래 문헌이 정통적인 고래학이라 믿어서는 안 된다.
- 「백경1」(허먼 멜빌 지음, 현영민 옮김, 신원) 중에서
그래 놓고, 허먼 멜빌은 예의 그 79개의 문장을 열거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요.
- 자, 그러면 자네가 제공해 준 문헌을 살펴보겠네.
그 '문헌'이 그대의 취향에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그대가 직접 대면해서 판단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고래에 대한 문장들이 단지 무미건조한 듯 열거되어 있다는 외관상의 이유만으로 부디 모비딕으로부터 도망가지 말기 바랍니다. 그 문장들이야말로 허먼 멜빌이 쏟아낸 열정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3. 도서관 책 먼지를 마시며 고래를 찾아다니다
앞에서 우리는 79개의 자료 문장들이 '어느 사서 조수 대리'가 찾아준 것이라고 소개받았습니다. 사서도 아닌, 사서의 조수도 아닌, 사서의 조수의 대리라고 명명된, 그렇게 존재감 낮은 사람으로 보이도록, 독자들이 주목하지 못하도록 호명된 이가 허먼 멜빌 자신이라는 점을 그대가 떠올린다면, 도서관에서 오랜 시간 책의 밀림을 헤쳐가며 '책이란 책에서 고래와 관계가 있는 구절이면 무턱대고 모조리 수집한', 그런 중노동을 한 장본인이 바로 허먼 멜빌이라는 것을 그대가 눈치챈다면, 그대는 어찌 이 작가의 열정 앞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작가는 이 소설의 입구에서 자신이 이 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고래에 대해 공부했는지를, 우리의 옆구리를 툭 치며 슬쩍 우리에게 속삭여주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허먼 멜빌은 '어원부'의 내용을 '가슴 질환으로 세상을 떠난 어느 중학교의 조교가 제공해 준 바에 의함'이라고 적어두었습니다. 이 문장을 읽으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소설 문법을 축조해내기 위해, 도서관에 틀어박혀 온갖 책을 다 뒤져 풀풀 피어오르는 책 먼지를 마셔가며, 고래에 관한 문장이란 문장은 다 찾아서 메모하며 직접 고래를 연구하던 작가는, 이러다가는 끝내 자신이 가슴 질환으로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는 걱정을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득 허먼 멜빌이 되어 우리도 도서관에 가고 싶습니다. 거기서 책장 넘어가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거기서 공부하는 사람들의 열정을 느끼고 싶습니다. 거기서 책 냄새를 맡으며 하염없이 책을 뒤지며 기록하며 책의 늪에 빠지고 싶습니다. 그런 진지한 일이 아니더라도, 구석의 서가 기둥에 기대어 숨어있거나, 어느 눈 밝은 책 하나가 마침내 저를 지목할 때까지 국외자처럼 마냥 어슬렁거리고 싶습니다. 글 읽고 마음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모비딕」 연관 글을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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