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진 시인님의 시 '해'를 만납니다. '고운 해'가 기다려지는 시입니다.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그리고 어두운 저마다의 무명(無明)을 밝혀주는 '고운 해' 말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박두진 시 '해' 읽기
해
박두진(1916~1998년, 경기 안성)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맑앟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 이글 애뙨 얼굴 고은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딿아, 사슴을 딿아,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딿아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딿아 칡범을 딿아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애뙤고 고은 날을 누려 보리라.
▷「박두진 전집 제1권」(박두진 지음, 범호사, 1982년) 중에서.
2. 박두진 시인의 첫 시집 첫 시는 '해'
박두진 시인님은 박목월 조지훈 시인님과의 3인 공동시집 「청록집(靑鹿集)」을 발간(1946년)하고, 3년 뒤인 1949년 첫 개인시집 「해」를 발간합니다.
오늘 만나는 시 '해'가 첫 개인시집의 제목이 되었네요.
뿐만 아니라 시 '해'는 박두진 시인님 첫 개인시집 「해」에 첫번째로 실린 시이기도 합니다.
첫 시집의 첫시, 그리고 첫 시집의 제목이 된 시 '해'는 그만큼 시인님에게도 소중한 시라는 뜻이겠지요?
1982년에 나온 「박두진 전집」에 실린 표기대로 시 '해'를 만나봅니다. 지금과는 맞춤법이 다르지만 시인님이 발표하던 때의 느낌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 보려고요.
시 '해'가 처음 세상에 나온 때는 1946년 5월, 발표 지면은 「상아탑」이었습니다.
그때는 강압적이고 잔혹한 일제의 억누름에서 해방된 이듬해였지만, 일제 식민지에서 입었던 아픈 상처들로 우리 민족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었던 때입니다.
그런 어두운 시간, 시인님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는 것만 같습니다. 이렇게요.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맑앟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 이글 애뙨 얼굴 고은 해야 솟아라.'
'해'는 밝고 따뜻하며 희망차고 평화로운 세계의 상징입니다.
'해야 솟아라', 이렇게 외치는 화자는 지금 그만큼 어둡고 춥고 절망적이며 혼란스럽고 불안한 세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해야 솟아라', 이 구절이 1연에서 네번이나 등장합니다. 간절함과 긴박함이 고조됩니다.
'맑앟게(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아침에 뜨는 해의 얼굴, 맑고 밝고 깨끗한 해가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네요.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어둠을 헤치고'가 아니라 '어둠을 살라먹고'라는 구절이 가슴에 파고듭니다.
어둠의 시간은 무섭고 고통스러운 시간입니다. 그런 암울한 시간을 남겨두지 말고 다 '살라먹고' 다 없애버리고 '해야 솟아라'라고 합니다.
이 시의 핵심구절인 '해야 솟아라'에서 우리는 생각이 많아집니다.
이 구절은 당시 일제의 억눌림으로부터 우리 민족이 해처럼 늠름하게 치솟아 오르기를 갈망하는 화자의 기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해야 솟아라'라는 구절에서 희망이 사라진 시대, 거짓과 불공정이 판치는 시대를 해가 환하게 밝혀주기를 소망합니다.
또 어떤 이는 이 구절에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무명(無明)에 빠져있는 자아(自我)를 깨우쳐주기를 기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인 이상향의 구현'이라는 이 시의 주제가 우리 가슴에 무겁게 안겨오네요.
3.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보리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
'해야 솟아라'라면서 광명(光明)을 갈망하는 화자는 2연에서 슬픔과 번민, 외로움과 쓸쓸함으로 가득한 '눈물 같은 골짜기의 달밤'이 싫다고 합니다.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은 슬픔과 번민, 외로움과 쓸쓸함이 가득한 시공간입니다.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청산(靑山)'은 '고운 해'가 있는 맑고 밝은 세상입니다. '눈물 같은 골짜기'들이 속속들이 환하게 밝아진 세상입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이 억눌림 없이 아름답게 살아가는 곳이겠지요?
'해'를 진정한 자아로 읽는 사람에게 '청산'은 탐진치(貪瞋痴)라는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난 해탈의 세계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슴을 딿아, 사슴을 딿아,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딿아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딿아 칡범을 딿아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
순한 '사슴'과 숲의 제왕인 '칡범'이 등장하네요.
'칡범'은 몸에 칡덩굴 같은 어룽어룽한 줄무늬가 있는 범(호랑이)을 말합니다.
그러니 '사슴'과 '칡범'은 약자와 강자의 상징입니다.
서로 억누르고 억눌리는, 먹고 먹히는 잔혹한 사슬에서 벗어나 모든 생명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행복한 '청산'을 지향합니다.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애뙤고 고은 날을 누려 보리라.'
'고운 해'가 솟은 '청산'은 인간과 자연('꽃도 새도 짐승도')이 구별 없이 서로 하나로 어우어지는 세계입니다.
그곳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사회, 바로 이상향(理想鄕)이겠지요?
'애뙤고 고은 날'. 여기서 '앳되다'는 사전적 의미로는 '애티가 있어 어려 보이다'라는 뜻입니다.
'천진난만(天眞爛漫)'이라는 문장이 떠오르네요. '애뙤고 고은 날'은 그렇게 아무런 꾸밈이 없이 하늘이 준 그대로의 성정(性情)으로 사는 순수한 세상이겠네요. 어둠이 없는 세상, 갈등과 번뇌가 없는 화해로운 경지 말입니다.
이 마지막 연이 이 시의 주제연이네요.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우리 시대의 '골짜기'에, 아니 저마다의 '골짜기'에 '고운 해'가 솟기를, 그리하여 우리 모두 '애뙤고 고은 날'을 누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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