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기 시인님의 시 '실솔가(蟋蟀歌)'를 만납니다. '실솔가(蟋蟀歌)'는 귀뚜라미(蟋蟀) 노래(歌)라는 뜻이네요.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떤 생각이 나시나요?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이형기 시 '실솔가(蟋蟀歌)' 읽기
실솔가(蟋蟀歌)
이형기(1933~2005년, 경남 사천)
시름은 도른도른
물같이 흐르는
가을밤 귀뚜리.
초가지붕에
뚫어진 영창에
조용히 잠든 눈시울 위에.
옛날 옛날 먼 이야기
몇 구비 돌아간 연륜(年輪)의 자욱.
달은 밝았다,
나는 울고 싶었다,
모두가 그날 같은
가을밤
귀뚜리 ······
그렇게 가지런한
그림 한 폭.
▷「이형기 시전집」(이재훈 엮음, 한국문연, 2018년) 중에서.
2. 귀를 뚫고 가슴 깊이 파고드는 귀뚜라미 소리
귀뚜리미에 대한 시 한 편을 만납니다.
이형기 시인님의 시 '실솔가(蟋蟀歌)'입니다.
이 시는 1963년 발표된 시인님 첫 시집 「적막강산」에 실려 있습니다. 시인님 30세 즈음의 시네요.
이 시집에는 우리 모두 사랑하는 시인님의 시 '낙화'가 실려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 말입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이형기 시 '낙화' 중에서
오늘 만나는 시 제목 속의 '실솔(蟋蟀)'은 귀뚜라미를 말합니다. 귀뚜라미를 왜 '실솔'이라고 할까요?
귀뚜라미 '蟋(실)' 귀뚜라미 '蟀(솔)'입니다.
두 글자 모두 벌레 '충(虫)'을 부수로 하고 있네요. 그리고는 다 '悉(실)', 거느릴 '率(솔)'을 각각 옆에 끼고 있고요.
'悉(실)'에는 '다, 모두, 남김없이, 다하다, 깨닫다'의 뜻이 있습니다.
'率(솔)'에는 '거느리다, 통솔하다, 따라가다'의 뜻이 있고요.
그래서 이 두 글자 '蟋蟀(실솔)'을 보면, 귀뚜라미가 떠오르는 것만 같습니다. 서로의 울음소리를 '따라서' '한없이' '남김없이' 울고 있는 귀뚜라미 말입니다.
'실솔가(蟋蟀歌)'는 그런 '귀뚜라미 노래'라는 뜻이네요.
'시름은 도른도른 / 물같이 흐르는 / 가을밤 귀뚜리'
'도른도른'을 '도란도란' 또는 '두런두런'으로 새겨봅니다. 여럿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소리입니다. 개울물이 잇따라 흘러가는 소리도 '도란도란'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물같이 흐르는 가을밤 귀뚜리'라는 구절이 가슴으로 들어오네요.
시름은 근심과 걱정을 말합니다. '가을밤 귀뚜리'의 울음소리가 그렇다는 말인데요, 그건 바로 시인님 마음이 그렇다는 말이겠지요?
모든 것이 쇠락하는 가을, 누구라도 서럽고 시름하지 않겠는지요?
'도른도른 물같이 흐르는'에서 우리는 그 귀뚜리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져 멀리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 서러운 마음, 시름같은 귀뚜리 소리가 하염없이 가을밤이라는 시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네요.
이 시에서는 '귀뚜리'라고 불렀는데, 귀뚜라미는 지역마다 정말 다양한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렇게요.
귀뚜리(전남 충청 함북), 꾸뚤기(평북), 구이뚜리(충남), 귀또리(강원 전남 평남 함남), 귀뜨리(평남 함남), 귀뜰기(평북), 기뚜리(전남 충청 함북), 끼뚜리(함경), 끼뜨리(경북) ······.
그런데 '귀'가 많이 들어가네요. 귀를 뚫고(!) 머릿속으로, 가슴 깊이 들어오는 귀뚜라미 소리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까요?
3. '가지런한 그림 한 폭' 속으로 데려가는 귀꾸라미 소리
'초가지붕에 / 뚫어진 영창에 / 조용히 잠든 눈시울 위에
옛날 옛날 먼 이야기 / 몇 구비 돌아간 연륜(年輪)의 자욱'
귀뚜리 울음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우리는 어딘가로 끌려가는 것만 같습니다.
'도른도른 물같이 흐르는' 그 소리를 따라서 말입니다.
시의 화자는 귀뚜리 울음에 잠겨 먼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영창(映窓)'은 '방을 밝게 하려고 방과 마루 사이에 낸 두쪽의 미닫이'를 말하네요.
'옛날 옛날 먼' 기억 속에서 귀뚜리 울음소리가 '초가지붕에' '영창에' '잠든 눈시울 위에' 흐르고 있다고 합니다.
마음의 동요가 없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연륜(年輪)'은 나무의 나이테를 말합니다. 둥근 테 하나가 1년의 '자욱'입니다.
그 '연륜'이 몇 구비가 돌아간 '옛날 옛날 먼 이야기'로 화자를 데려갔네요. 귀뚜리 울음이 말입니다.
'달은 밝았다 / 나는 울고 싶었다'
화자는 귀뚜리를 따라 갔던 '옛날 옛날 먼 이야기'에서 현실로 문득 돌아왔습니다.
달빛이 환하게 쏟아지는 가을밤이네요.
자꾸 무언가 마음 속에 쌓이는 가을밤요.
귀뚜리 울음도 자꾸 쌓이고요, 달빛은 자꾸 쌓이고요, 시름도 자꾸 쌓이고요.
어찌 서럽지 않겠는지요?
'모두가 그날 같은 / 가을밤 / 귀뚜리 ······
그렇게 가지런한 / 그림 한 폭'
'가을밤'과 '귀뚜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네요.
우리들만이 그 변함없는 것들로부터 멀리 흘러왔네요.
'나는 울고 싶었다'
이 울음을 달래주는 것은 무얼까요?
귀뚜리가 데려가준 저마다의 평화로운 한 때일 것입니다.
귀뚜리, 현재와 과거를 이어주는 메신저네요.
우리도 이렇게 지금의 시름을 견디는 걸까요?
시인님이 구축해놓은 ‘가지런한 그림 한 폭’에 마음을 씻으며 말입니다.
달빛이 환한 가을밤에, 귀뚜리 소리 가득한 가을밤에 퐁당 마음을 빠뜨려 흔들어 헹구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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