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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이수복 시 실솔(蟋蟀) 귀뚜라미

by 빗방울이네 2024.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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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복 시인님의 시 '실솔(蟋蟀)'을 만납니다. '실솔'은 귀뚜라미를 일컫는 한자어입니다. 귀뚜라미가 계절을 뽑아내기 위해 운다고 하네요.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이수복 시 '실솔(蟋蟀)' 읽기

 

실솔(蟋蟀)

 

이수복(1924~1986년, 전남 함평)

 

능금나무 가지를 잡아 휘이는 

능금알들이랑

함께 익어 깊어드는 맑은 햇볕에

 

다시 씻어 발라메는 문비(門扉) 곁으로

고향(故鄕)으로처럼 날아와지는 ······

한 이파리 으능잎사귀

 

- 깊이 산을 헤쳐오다 문득 만나는

어느 촉루(觸髏) 우에 신기(蜃氣)하는 아미(娥眉)와도 같이

자취 없이 흐르는 세월들의 

기인 강물이여!

 

옥색 고무신이 고인 섬돌 엷은 그늘에선

즐즐(喞喞) 계절을 뽑아내는 

적은 실솔(蟋蟀)이여.

 

▷ 「이수복 전집 - 봄비와 낮달」(광주광역시문인협회 엮음, 예원, 2010년)에 실린 이수복 시집 「봄비」 영인본 중에서

 

2. '봄비의 시인' 이수복 시인의 첫 시집 첫 시는 '실솔'

 

'이 비 그치면 /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

- 이수복 시 '봄비' 중에서.

 

우리가 참으로 사랑하는 '봄비의 시인' 이수복 시인님의 시 '실솔(蟋蟀)'을 만납니다.

 

시 '실솔(蟋蟀)'은 1968년 현대문학사에서 발간된 시인님의 첫 시집이자 유일한 시집 「봄비」에 실린 시입니다.

 

위 책 「이수복 전집 - 봄비와 낮달」의 마지막 부분에 시집 「봄비」가 영인본으로 실려있어 매우 반갑네요.

 

시집 발간 당시 그대로 페이지마다 사진을 찍어 실은 이 영인본 「봄비」을 펼쳐보니, 이 시집의 첫 시가 바로 '실솔(蟋蟀)'입니다.

 

첫 시집 첫 시는 시인님의 자부심이겠지요?

 

시인님이 쓴 시집의 '후기'에 이런 글이 실려있네요.

 

세 편(동백꽃, 실솔, 봄비)의 시작(詩作) 말고는 

나머지 어느 것에 대해서도 자신을 가질 수가 없어 불안한 것뿐이다.

▷이수복 시집  「봄비」 후기 중에서.

 

이 글에서 언급한 세 편이 바로 시인님을 시인의 길로 들어서게 한 데뷔작입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추천으로 「문예」(1954년, '동백꽃'), 「현대문학」(1955년, '실솔', '봄비')에 잇달아 발표된 것입니다. 

 

'후기'에서 알 수 있듯, 이 세 편에 대한 시인님의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겸사(謙辭)겠지만, 이 세 편 말고 나머지는 '불안한 것'이라고 했네요.

 

세 편 중에서 '실솔'을 첫 시집의 첫 시로 배치한 것을 보니, 시인님의 '실솔'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집의 제목은 '봄비'로 했지만요.

 

'실솔(蟋蟀)'은 귀뚜라미를 일컫는 한자어입니다. 귀뚜라미 '蟋(실)', 귀뚜라미 '蟀(솔)'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곤충을 한자어로 부르는 일을 잦았는데요, 참고로 '청령(蜻蛉)'은 잠자리, '당랑(螳螂)'은 사마귀를 말합니다. 

 

시 '실솔(蟋蟀)'은 어떤 시일까요?

 

"즐즐_계절을_뽑아내는"-이수복_시_'실솔'-중에서.
"즐즐 계절을 뽑아내는" - 이수복 시 '실솔' 중에서.

 

 

 

3. '즐즐 계절을 뽑아내는 적은 실솔이여'

 

계절이 건너가는 시간입니다. 여름에서 가을로 말입니다.

 

이 가을에 그대의 시선은 어디로, 무엇을 향해 있나요?

 

시인님의 시선은 이렇게 낮은 곳, 사람들이 잘 눈여겨보지 않는 외진 것을 향해 있네요.

 

'능금나무 가지를 잡아 휘이는 / 능금알들이랑 / 함께 익어 깊어드는 맑은 햇볕에'

 

사과알이라는 말도 좋지만 '능금알'에서는 더 짙은 향기가 나는 것만 같습니다.

 

'맑은 햇볕'에 만물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그 따가운 햇볕에 시인님의 마음도 맑게 익어 깊어지는 초가을이네요.

 

'다시 씻어 발라메는 문비(門扉) 곁으로 / 고향(故鄕)으로처럼 날아와지는 ······ / 한 이파리 으능잎사귀'

 

'문비(門扉)'는 국어사전에 '문틀이나 창틀에 끼워서 여닫게 되어 있는 문이나 창의 한 짝'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니 '문' 또는 '문짝'을 말하네요.

 

'다시 씻어 발라메는(발라매는)'. 시인님은 지난 계절을 나는 동안 비바람에 더러워지고 헐거워졌던 '문비(門扉)'를 재정비합니다. 

 

그렇게 가을맞이를 하는 중에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문짝 곁에 '한 이파리 으능잎사귀'가 날아와 떨어졌네요. 이렇게 작고 연약한 사물에 마음이 메이는 시인님의 곱고 섬세한 눈길이 느껴집니다.

 

'으능잎사귀'는 '은행잎'입니다(「이수복 시전집」, 장이지 엮음, 현대문학).

 

'으능'을 자꾸 말하다 보면 거기에 '은행'이 들어있습니다. 시인님의 고향 함평 말이겠지요? 참으로 정다운 '으능'이네요.

 

은행나무 이파리 하나가 문 옆에 떨어지는 것을 시인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향(故鄕)으로처럼 날아와지는 ···'. 은행이파리는 계절의 변화 속에 자신이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곳이 마치 고향이라도 된다는 듯이요.

 

'한 이파리 으능잎사귀'. 이파리가 두 장도 아니고 단 한 장이라고 강조되어 있네요.

 

'고향(故鄕)으로처럼 날아와지는 ···'. 저 말줄임표( ···) 속에는 쇠락과 소멸의 시간을 응시하는 시인님의 한숨이 들어있는 것만 같네요.

 

'- 깊이 산을 헤쳐오다 문득 만나는 / 어느 촉루(觸髏) 우에 신기(蜃氣)하는 아미(娥眉)와도 같이

자취 없이 흐르는 세월들의 / 기인 강물이여!'

 

'- 깊이 산을 헤쳐오다 문득 만나는'. 영인본 시집 「봄비」는 본문이 세로로 된 편집인데, 이 구절의 맨 앞 선('-')은 활자 2개 정도의 길이로 세로로 길게 그으져 있습니다. '깊이 산을 헤쳐'오는 모습이 시각적으로 느껴지네요. 

 

'촉루(觸髏)'는 '살이 전부 썩은, 죽은 사람의 머리뼈'입니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읊는 시에 자주 등장하는 시어입니다.

 

'신기(蜃氣)'는 '신기루(蜃氣樓)'에서 그 의미를 새겨봅니다. '신기루'는 홀연히 나타나 짧은 시간 동안 유지되다가 사라지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일이나 현상을 말합니다.

 

'아미(娥眉)'는 '누에나방 눈썹'이라는 뜻인데 가늘고 길게 굽어진 아름다운 눈썹, 즉 미인의 눈썹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느 촉루(觸髏) 우에(위에) 신기(蜃氣)하는 아미(娥眉)와도 같이'에서 해골 위에 어른거리는 미인의 눈썹이 떠오르네요.

 

아미(娥眉)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도 해골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삶의 무상함이여!

 

계절의 길목에서 수심(愁心)이 깊어진 이렇게 시인님은 서러워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렇게요.

 

'옥색 고무신이 고인 섬돌 엷은 그늘에선 / 즐즐(喞喞) 계절을 뽑아내는 / 적은 실솔(蟋蟀)이여.'

 

이 시의 제목이 된 실솔(蟋蟀), 귀뚜라미는 어디 숨어있다 이렇게 맨 마지막 4연에 등장하네요.

 

'옥색 고무신'은 옥의 빛깔과 같은 흐린 초록색을 띤 고무신입니다. 여인의 것이겠네요.

 

'옥색 고무신이 놓인 섬돌'이 아니라 '옥색 고무신이 고인 섬돌'이라고 합니다. 괴어있는 듯 오래오래 그 자리에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면 여인이 혼자 사는 집이네요. 시집올 때 신고 온 옥색 고무신이 낭군님의 고무신 없이 홀로 있는 쓸쓸한 풍경으로 다가오네요.

 

그 허전하고 서러운 섬돌 그늘에서 '적은 실솔(蟋蟀)'이 울고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요?

 

즐즐즐즐즐즐즐즐(喞喞喞喞喞喞喞喞)······.

 

'喞'은 두런거릴 '즐'자입니다. 한자사전에서 이 글자의 뜻을 더 볼까요? '벌레소리' 또는 '탄식하는 소리'라는 뜻도 있네요.

 

그래서 '즐즐(喞喞) 계절을 뽑아내는'이라는 구절에서 신기하게도 우리는 귀뚜라미가 어떤 소리로 우는지, 어떤 기분으로 우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우는지 다 알게 되네요.

 

'즐즐(喞喞) 계절을 뽑아내는'. 이렇게 귀뚜라미가 '옥색 고무신이 고인 섬돌 엷은 그늘', 그 서러운 공간에서 계절을 뽑아내고 있다고 합니다. 짝을 애타게 그리워하면서요, 상실과 부재를 탄식하고 서러워하면서요. 

 

이 구절이 한자어 없이 '질질 계절을 뽑아내는'이라고 표현된 시집(「이수복 시전집」, 장이지 엮음, 현대문학)도 있습니다.

 

이수복 시인님은 '즐즐 계절을 뽑아내는' 귀뚜라미를 무척 좋아했나 봅니다.

 

'귀뚜라미', '추일'이라는 제목의 시도 귀뚜라미가 소재입니다. 

 

그중 1974년 11월 「현대문학」에 발표한 시 '추일(秋日)'을 함께 읽어볼까요?

 

시인님 31세이던 1955년에 발표한 '실솔(蟋蟀)'에 등장하는 주요 시어 몇 개가 1974년 50세 때 쓴 이 시에 그대로 등장해 이채롭습니다.

 

추일(秋日)

 

이수복

 

실솔(蟋蟀)이 한나절 타고 내리는

가늘은 곡선

- 샘물에 몰래 비치는 낮달의.

 

먼 곳, 바다가 꾸기는 투명한 파상(波狀)이여.

 

산을 옮길 힘도 못 가지는 것이

문비(門扉) 닫히인 그늘 밑까지 찾아와서는

즐즐(喞喞) 

묻힌 여운들을 불러내쌓네.

 

▷「이수복 전집 - 봄비와 낮달」(광주광역시문인협회 엮음, 예원, 2010년) 중에서.

 

위에 파란색으로 표기된 '실솔(蟋蟀)' '문비(門扉)' '그늘' '즐즐(喞喞)' 같은 시어들이 20년 후 다시 그대로 등장했네요.

 

이 두 편의 시를 나란히 놓고 보니 시편들 속에 깃든, 곱고 섬세한 시인님의 성정(性情)이 다 느껴지는 것만 같습니다.

 

평생 작고 연약한 것, 낮고 외로운 것을 서러워하고 사랑했던 시인님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가을밤입니다.

 

아, 이제 귀뚜라미를 만나면 말해줘야겠어요.

 

- 너 참 수고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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