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마종기 시인님의 시 '바람의 말'을 듣습니다. 시들은 저마다 고유한 공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시는 우리를 어떤 분위기의 공간으로 데려가 줄까요? 마종기 시인님이 마련해 둔 그 공간으로 들어가서 함께 마음을 씻으며 독서목욕을 해봅시다.
1. 마종기 시 '바람의 말' 읽기
바람의 말
-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 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마종기 시집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문학과지성사) 중에서
1939년 일본 도쿄 태생인 마종기 시인님은 마해송 아동문학가님의 아들입니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했으며, 1959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습니다.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방사선과 전문의로 활동하면서, 삶과 죽음을 오가며 겪은 격렬하고 아프고 쓸쓸한 체험들을 따뜻하게 감싸안는 시를 써왔습니다. 시집 「조용한 개선」 「두번째 겨울」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 뿐이랴」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등을 냈으며, 한국문학작가상, 편운문학상, 이산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가슴을 메이게 하는 다감한 시
오늘 우리가 만나는 시 ‘바람의 말’은 1977년 즈음에 쓰인 시로, 마종기 시인님의 시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시로 꼽힙니다. 따뜻하고 다정한 느낌이 드시지요? 이 시가 실린 시집 맨 뒤에 붙어있는 김주연 문학평론가님의 시집 해설 제목도 ‘따뜻한 마음 따뜻한 시’입니다.
예쁜 시, 아름다운 시, 슬픈 시,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쉽고도 정직한 시. 이번따라 유난히 그의 시가 가슴을 메이게 한다. (중략) 감상적인 느낌마저 줄 정도로 여리고 다감한 것이 그의 시가 주는 분위기다.
- 위 시집 김주연 문학평론가님의 해설 중에서
이 시집은 가장 유명한 시집 시리즈의 하나인 '문학과 지성 시인선' 두번째 차례로 1980년 9월에 나왔는데, 빗방울이네는 1990년 이 시집의 12쇄 본으로 처음 만났습니다. 한때 청춘 빗방울이네는 이 짧지 않은 시를 어찌어찌 외워 친구들 앞에서 읊어주면서, 그 청춘 때에는 아직 이해되지 않았을 아득한 슬픔과 까닭 모를 그리움에 젖어 속으로 하염없이 울적해하곤 했더랬습니다. 아이참.
영혼의 영원성, 사랑과 이별과 부재, 추억과 그리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읽힙니다. 이 시는 특유의 모호성 속에서 다이아몬드처럼 다양한 각도에서 빛을 냅니다. 슬픈 사람에게는 슬픔 뒤의 모습을 얼핏 보여주면서 다정하게 다독여 씻어주고, 기쁜 사람에게는 상실의 시간, 가까이 와 있는 이별을 예감하게 하면서 아득한 슬픔에 담가 흔들어 씻어줍니다.
그대는 이 시의 어느 대목에 시선이 머무는지요? 빗방울이네는 이 시의 대목이 일상에서 불쑥 재생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 마종기 시 ‘바람의 말’ 중에서
여기서 등장하는 ‘지척의 자’는 뭘까요? 지척(指尺)은 옛날 논밭의 계량 척도입니다. 어른 농부의 손가락을 기준으로, 네 손가락의 폭이 4촌입니다(10촌이 1척). 지금도 쓰입니다. 십이지장(十二指腸)도 지척으로 잰 겁니다. 네 손가락을 세 번 겹친 길이 만하다고 해서 십이지장입니다. 시인이 의사이니 '지척의 자'라는 표현도 등장했으리라 생각해봅니다.
그러니까 원칙과 규칙, 규정과 법만 좇는 이들에게 시인은 그것 말고 다른 세계도 있다고 말해주네요.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그렇게 지척의 자로 잴 수 없는 세계, 아득한 세계가 있다고 시인은 말해줍니다. 보이는 것만 믿고, 그런 것에 대롱대롱 매달려, 보이는 것의 절벽 끝으로 밀려가고 있는 우리에겐 얼마나 큰 안심인지요.
3. 어찌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이 시를 낭송하는 예의 그 청춘 빗방울이네는 2연과 3연이 이어지는 시행에서, 자신이 마치 잘 하는 연극배우라도 된 듯 아주 극적인 분위기에 젖고 맙니다.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 마종기 시 ‘바람의 말’ 중에서
그렇게 좌중의 분위기를 끌어올린 뒤 이럽니다. 다소 시니컬한 어조로 말입니다. 그 참.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 마종기 시 ‘바람의 말’ 중에서
시인은 ‘지척의 자’로만 재며 살지 말자고 하네요. 그것이 비록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시인의 말처럼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그대가 간절히 그리워하는 부재의 그이가 응답할 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시인의 이 말은 얼마나 다정한지요?
글 읽고 마음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그대를 울렁이게 하는 시를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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