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함민복 시인님의 시 '마흔 번째 봄'에 스며봅니다. 그냥 봄이 아니고 마흔 번째 봄이라고 합니다. 혹시 올해 마흔인가요? 마흔이더라도 아니더라도 이 시는 앞으로 가는 우리를 불러 세웁니다. 함민복 시인님의 울렁이는 시의 욕조에서 함께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함민복 시 '마흔 번째 봄' 읽기
마흔 번째 봄
- 함민복
꽃 피기 전 봄 산처럼
꽃 핀 봄 산처럼
꽃 지는 봄 산처럼
꽃 진 봄 산처럼
나도 누군가의 가슴
한번 울렁여보았으면
- 함민복 시집 「꽃봇대」(대상) 중에서
1962년 충북 중원군 출생인 함민복 시인님은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88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했습니다. 시집 「우울 氏 의 一日」, 「자본주의의 약속」,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말랑말랑한 힘」 등을 냈고,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비롯 김수영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애지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등을 받았습니다.
시집에 소개된 시인의 약력을 보는데 '강화도의 자연과 역사와 물고기를 공부하며 지금도 조용히 마음의 길을 닦고 있다'라는 문장이 가슴으로 쑥 들어옵니다. '마음의 길을 닦고 있다'라는 문장 말입니다. 이 문장이 오늘의 시를 읽는 길잡이 역할을 할 것 같습니다.
2. 왜 마흔 번째 봄일까요?
그런데 이 시집의 제목이 「꽃봇대」인데, 무슨 뜻일까요? 시집 속에 같은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시죠.
꽃봇대
- 함민복
전등 밝히는 전깃줄은 땅속으로 묻고
저 전봇대와 전깃줄에
나팔꽃, 메꽃, 등꽃, 박꽃 ······ 올렸으면
꽃향기, 꽃빛, 나비 날갯짓, 벌 소리
집집으로 이어지며 피어나는
꽃봇대, 꽃줄을 만들었으면
- 위의 같은 시집 중에서
함민복 시인님이 어떤 시를 쓰시는 분인지 금방 짐작이 되시지요? 전봇대를 통해 전기가 집집이 들어가듯, 전봇대에 꽃을 올려 '꽃향기, 꽃빛, 나비 날갯짓, 벌 소리'를 집집이 보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상상하는 따뜻한 시인입니다. 그럼, 함민복 시인님이 건축한 꽃봇대를 타고 올라가는 나팔꽃의 몸짓으로 오늘 그의 시를 타고 함께 올라가 볼까요?
그러니까 이 시 '마흔 번째 봄'은 시인님이 마흔 살에 쓰셨네요. 왜 하필이면 '마흔 번째' 봄일까요? 서른 번째 봄이라 할 수도 있을 텐데요.
아시다시피 마흔 살의 의미는 각별합니다. 논어의 '四十而不惑'라는 말이 떠오르시지요? 마흔 살이면 세상 일에 '불혹(不惑)' 즉 미혹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빗방울이네는 이 '미혹되지 않음'을, 삶에서 가장 왕성한 나이인 마흔은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가는 시간이라고 읽고 싶습니다. 그동안 다른 이의 가르침대로 충고대로 살았다면, 이젠 그 공부를 밑거름으로 자신만의 색깔을 펼쳐 보이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의 제목이 시를 다 말해주었습니다.
이 시의 몸체에는 봄 산이 등장합니다. 봄 산이라는 말만 들어도 설레네요. 추운 겨울 검고 회색으로 잠자는 것처럼 보이던 산이 봄이 되면 온통 구석구석 꼬무락대며 일렁이며 깨어나 자신의 색깔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시인은 꽃이 피기 전부터 그 산을 보고 있네요. 꽃이 필 때도, 꽃이 질 때도, 꽃이 지고 없을 때도 산을 보고 있네요. 이렇게 시인은 산이 무언가 근사한 한 마디를 해줄 때까지 떼를 쓰며 기다리는 존재인가 봅니다.
결국 시인은 봄 산으로부터 한 말씀 들었습니다. 이렇게요.
나도 누군가의 가슴 / 한번 울렁여보았으면
- 함민복 시 '마흔 번째 봄' 중에서
마흔 번째 봄날 시인은 자신을 울렁이게 하는 산의 찬란을 보면서 저 봄 산처럼 자신도 누군가의 가슴을 한 번이라도 울렁이게 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또한 '너희는 누군가의 가슴 한번 울렁이게 해 보았는가' 하고 묻는 의문문, 아니 시인의 명령문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빗방울이네는 시선을 어디에 둘 지 모르겠고, 구석에 숨고 싶습니다.
3. 연하고 따습고 소박하고 여유로운!
그런데요, 사실 빗방울이네는 2개의 연으로 된 이 시를 읽으면서 1연에 더 시선이 많이 갔습니다.
꽃 피기 전 봄 산처럼 / 꽃 핀 봄 산처럼 / 꽃 지는 봄 산처럼 / 꽃 진 봄 산처럼
- 함민복 시 '마흔 번째 봄' 중에서
이 문장에 쓰인 시간만큼 봄 산을 보고 있는 시인을 생각합니다. 참말로 연하고 따습지 않습니까? 시인의 마음이요. 참말로 소박하고 여유롭지 않습니까? 시인의 시간이요.
빗방울이네는 봄 산을 이렇게 오랫동안 켜켜이 지켜본 적이 없습니다. 봄 산을 지켜보면서 이렇게 오랫동안 켜켜이 제 자신을 지켜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지켜봤으면 봄 산이 정말 근사한 문장을 건네주었을 텐데 말입니다. 함민복 시인님에게 준 것처럼요.
이 시집의 맨 끝에는 '내 후배 민복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있습니다. 김운경 드라마 작가님이 쓴 글인데,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네가 있어 내 마음이 밝다. 민복아.
- 위 같은 시집 중에서
함민복 시인님이 있어 마음이 밝아지네요. 그대 마음도 밝아졌지요?
글 읽고 마음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봄 시를 더 읽어 보세요.
'읽고 쓰고 스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용택 시 섬진강 11 읽기 (38) | 2023.03.07 |
---|---|
마종기 시 바람의 말 읽기 (22) | 2023.03.06 |
도종환 시 흔들리며 피는 꽃 읽기 (18) | 2023.03.04 |
김규동 시 해는 기울고 읽기 (26) | 2023.03.03 |
이기동 교수 - 나는 착각 덩어리다 (31) | 2023.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