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삼 시인님의 시 '묵화'를 감상합니다. 이 시는 여백이 많은 한 폭의 그림이네요. 시인님이 그려주신 묵화의 여백 속으로 걸어 들어가 함께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종삼 시 '묵화' 읽기
묵화(墨畫)
- 김종삼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김종삼 전집」(권명옥 엮음·해설, 나남출판, 2005) 중에서
김종삼 시인님(1921~1984)은 황해도 은율 출신으로 1947년 27세 때 월남했습니다. 1953년 종합잡지 「신세계」 에 시 '원정'을 발표하며 공식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군사 다이제스트 편집부, 국방부 정훈국 방송과 상임연출자(음악담당) 등을 거쳐 동아방송 제작부에서 음악연출을 담당했습니다.
1957년 김광림 전봉건 시인님과의 3인 시집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를, 1968년 김광림 문덕수 시인님과의 3인 시집 「본적지」를 냈고 1968년 첫 개인시집 「십이음계」를 발간했습니다. 이어 「시인학교」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등의 개인시집을, 「북치는 소년」 「평화롭게」 등의 시선집을 냈습니다. 제2회 현대시학 작품상, 한국시인협회상, 대한민국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의 의미는?
김종삼(1921~1984)은 다 아는 대로
우리 시에서 "가장 순도 높은 순수시"를 쓴 시인
또는 한국 현대시 사상 가장 뛰어난 시인의 한 사람 등으로
서슴없이 손꼽히는 인물이다.
- 「김종삼 전집」(나남출판) 중 권명옥 해설 '적막과 환영 - 끼인 시간대의 노래' 첫 문장
이렇게 멋진 시인님의 시 ‘묵화’를 만납니다. 과연 어떤 시일까요?
묵화(墨畫)
이 시의 제목이 '묵화(墨畫)'입니다. 묵화는 먹으로 그린 동양화입니다. 흑백 말고는 다른 색상이 없습니다. 이 시에서 삶의 다채로운 국면들은 다 휘발해 버린 걸까요?
그러나 여섯 줄짜리 이 짧은 묵화 속에는 다채로운 국면들이 다 수렴되어 있을 것만 같습니다. 검은색(먹)은 모든 색깔을 흡수하니까요.
물먹는 소 목덜미에 /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 김종삼 시 ‘ 묵화’ 중에서
그대는 이 첫 두 줄에서 어떤 구절이 가슴에 들어오는지요? 빗방울이네는 맨 마지막 ‘손이 얹혔다’에 심쿵이네요.
‘손이 얹혀졌다’고 합니다. ‘할머니가 손을 얹었다’가 아니고요. 자동입니다. 수동이 아니고요. 그냥 저절로 그리 되었다는 뜻이네요. 할머니가 그리하려고 의도한 것이 아니고요. 내 목덜미가 뻐근하면 무의식적으로 내 손이 가서 내 목덜미를 만져주듯이요. 부지불식간에요.
이 짧은 구절로 인하여 우리는 할머니와 소의 관계를 단박에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머니에게 소는 식구이자 형제이자 자식이자 바로 나 자신 같은 존재네요. 날마다 그리하였겠네요.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고요, 그 전날 전날에도요. 날마다 소의 목덜미에 할머니의 다정한 손이 ‘얹혔네요’.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 힘들었제? 자동기술적으로 그리 되어오고 있는 일이네요.
‘물먹는 소’는 하루 일과가 끝났다는 걸 말해주고 있네요. 하루종일 할머니와 함께 밭에서 일하고 이제 마구간에 와서 물을 먹고 있네요. 소의 물먹는 상황에서 우리는 할머니가 아직 요기를 하지 않은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은 하루종일 고생한 소보다 먼저 밥을 먹는 법이 없으니까요. 이렇게 목마르고 배고픈 소를 챙겨주고 또 목덜미도 여러 번 다정히 쓸어주고 할머니 늦은 저녁을 드시겠지요?
3. 지금 '나'의 손은 어디에 얹혀있나요?
이 하루도 / 함께 지났다고, /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 김종삼 시 ‘묵화’ 중에서
‘함께 지났다’에서 또 심쿵합니다. ‘지냈다’가 아니고 ‘지났다’이네요. 힘들었나 봅니다. 하루를 지나오기가요. 얼른 지나가버렸으면 하는 고단함이 느껴집니다. 그런 고된 하루를 ‘함께 지났다고’ 합니다. 얼마나 든든했겠는지요.
서로 적막하다고,
- 김종삼 시 ‘묵화’ 중에서
여기서요, 쉼표 좀 보셔요. 4행부터 모두 끝에 쉼표(,)가 찍혀있네요. 시가 끝나는 마지막행에도요.
이 쉼표는 앞으로도 많은 일들이 할머니와 소 사이에 일어날 거라는 의미이네요. 서로 함께 엮어갈 다채로운 삶의 장면들요.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서로 그렇게 가까이 의지하며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사랑하며 동행하기를 기원해 봅니다.
슬프고 아픈 일만 있겠는지요? 우리 삶도 한 겹 들춰보면 거기 사랑이 있지 않던가요? 너무나 소소한 듯하여 지나치기 쉬운, 작은 불씨 같은 거 말이에요. 단짝인 소의 목덜미에 얹혀진 할머니의 손 같은 거 말예요. 그렇게 없는 듯 보이는 희미한 사랑이 없다면 우린 어떻게 견디겠는지요?
누구나 외로운 시간, 지금 ‘나’의 손은 어디에 얹혀져 있나요? 아, 빗방울이네도 누구에게 좀 가보아야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안녕히.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김종삼 시인님의 시 ‘북치는 소년’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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