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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김규동 시 느릅나무에게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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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동 시인님의 시 ‘느릅나무에게’를 만납니다. 이 시는 함경북도 끝자락에 있는 어느 느릅나무에게 보내는 시인님의 슬픈 편지입니다. 어떤 내용일까요?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규동 시 ‘느릅나무에게’ 읽기


느릅나무에게

- 김규동

나무
너 느릅나무
50년 전 나와 작별한 나무
지금도 우물가 그 자리에 서서
늘어진 머리채 흔들고 있느냐
아름드리로 자라
희멀건 하늘 떠받들고 있느냐
8.15 때 소련병정 녀석이 따발총 안은 채
네 그늘 밑에 누워
낮잠 달게 자던 나무
우리 집 가족사와 고향 소식을
너만큼 잘 알고 있는 존재는
이제 아무 데도 없다
그래 맞아
너의 기억력은 백과사전이지
어린 시절 동무들은 어찌 되었나
산 목숨보다 죽은 목숨 더 많을
세찬 세월 이야기
하나도 빼지 말고 들려다오
죽기 전에 못 가면
죽어서 날아가마
나무야
옛날처럼
조용조용 지나간 날들의
가슴 울렁이는 이야기를
들려다오
나무, 나의 느릅나무.

- 김규동 시집 「느릅나무에게」(창비, 2005) 중에서


김규동 시인님(1925~2011)은 함경북도 종성 출신으로 1948년 「예술조선」 신춘문예에 시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1955년 한국일보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우리는 살리라’ ‘포대가 있는 풍경’이 각각 당선됐습니다. 연합신문와 한국일보 문화부장, 도서출판 삼중당 편집주간 등을 지냈고, 한일출판사를 창업했습니다.
1955년 첫 시집 「나비와 광장」을 낸 것을 비롯 시집 「현대의 신화」 「죽음 속의 영웅」 「오늘밤 기러기떼는」 「생명의 노래」 등을, 시선집 「깨끗한 희망」 「하나의 세상」 「길은 멀어도」 등을 냈습니다. 평론집으로 「새로운 시론」 「지성과 고독의 문학」 「어두운 시대의 마지막 언어」 등이, 산문집 「지폐와 피아노」 「어머님 전상서」 「어머님 지금 몇 시인가요」 「시인의 빈손:어느 모더니스트의 변신」 등이 있습니다.
자유실천문인협회, 민족문학작가회의,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고문을 지냈으며, 만해문학상, 자유문인협회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습니다.

2. 50년 전에 헤어진 느릅나무에게 보내는 편지


함경북도 종성이 고향인 김규동 시인님은 23세에 홀로 월남한 후 분단으로 길이 막혀 고향에 다시 가지 못했습니다.

나무 / 너 느릅나무 / 50년 전 나와 작별한 나무

- 김규동 시 ‘느릅나무에게’ 중에서


남쪽으로 내려오기 전 시인님은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과 학생이었네요. 1948년 어수선하던 해방 정국 시절에 시인님은 서울에 있는 스승 김기림 시인님을 만나 '한 삼 년 시 공부나 해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왔다고 합니다. 김일성종합대학 교복과 모자를 쓰고 말입니다. 그러나 분단으로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말았네요.

이 시가 실린 시집 「느릅나무에게」는 그렇게 외롭게 한평생 살아온 시인님의 마지막 시집입니다. 2005년에 나왔으니 시인님 80세 때네요. 1948년에 고향을 떠나왔으니 느릅나무와는 50년 이상 헤어져있었고요. 얼마나 고향이 그리웠겠는지요?

지금도 우물가 그 자리에 서서 / 늘어진 머리채 흔들고 있느냐

- 김규동 시 ‘느릅나무에게’ 중에서


이 느릅나무는 시인님 고향 집 우물가에 있는 느릅나무네요. 어떤 느릅나무일까요? 시인님의 다른 시 ‘그날에’에 이 나무의 형상이 나옵니다.

우리 집 우물가의 장한 느릅나무 / 무섭도록 무럭무럭 자라
비 오는 밤이면 / 후두둑 머리를 풀어헤쳐 / 귀신처럼 어린 가슴을 조이게 하던
오, 수많은 전설을 지닌 / 외로운 그림자여 나무여

- 김규동 시 ‘그날에’ 중에서


80세 이른 시인님은 고향집 느릅나무를 호명하네요.
 
시인님의 고향 종성을 구글 지도에서 찾아봅니다. 한반도 지도의 위 오른쪽 맨 끝에 있네요. 지도를 토끼로 치면 귀 맨 끝이요. 여기서 가장 먼 곳요.
 
시인님의 마음이 되어 머나먼 북녘 고장 종성의 어느 마을에 있을 느릅나무를 떠올려봅니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도 친구도 이제 고향에 남아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한한 생명의 인간과는 달리 느릅나무는 여전히 그 우물가를 지키고 서 있겠지요?

우리 집 가족사와 고향 소식을 / 너만큼 잘 알고 있는 존재는 / 이제 아무 데도 없다

- 김규동 시 ‘느릅나무에게’ 중에서


세월이 흘러도 너무 많이 흘러버렸습니다. 고향 소식을 알고 있을 만한 존재가 ‘이제 아무 데도 없다’고 하는군요. 벽을 마주한 듯, 황야에 홀로 버려진 듯했을 시인님의 절망과 허무감이 짙게 느껴집니다.
 

김규동시느릅나무에게중에서
김규동 시 '느릅나무에게' 중에서.

 

 

3. ‘죽기 전에 못 가면 죽어서 날아가마’

 

새벽달이 질 무렵 / 둔탁하게 울던 부엉이의 추억도
가족들의 높고 낮은 말소리도 / 하나 빠짐없이 간직하고
슬픔도 기쁨도 / 오직 너의 중심에 맡긴 채
동그란 고향 하늘 아래 숨 쉬고 있을까

- 김규동 시 ‘그날에’ 중에서


아무렴요. 다 간직하고 있고 말고요. 느릅나무의 중심에 다 있고 말고요. ‘가족들의 높고 낮은 말소리도’ ‘하나 빠짐없이’요. 우리는 하나의 커다란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을 테니까요.

우리는 이 대목에 이르러 저절로 고개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게 됩니다. 우리가 모르는 아득한 곳의 일을, 자연의 섭리를, 창조주의 손길을요.

그래 맞아 / 너의 기억력은 백과사전이지
어린 시절 동무들은 어찌 되었나 / 산 목숨보다 죽은 목숨이 더 많을 / 세찬 세월 이야기
하나도 빼지 말고 들려다오

- 김규동 시 ‘느릅나무에게’ 중에서


시인님에게 느릅나무는 그저 딱딱한 늙은 나무가 아니네요. 마지막 남은 북녘의 가족이네요. 어디에도 그리운 고향 소식을 물어볼 데가 없어 느릅나무에게 묻고 있는 시인님의 통한(痛恨)이 깊게 파고듭니다.

죽기 전에 못 가면 / 죽어서 날아가마

- 김규동 시 ‘느릅나무에게’ 중에서


이렇게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던 시인님은 결국 생전에 느릅나무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토록 바랐던 통일은 성취되지 못했고, 시인님은 2011년 9월 28일 87세의 일기로 타계해 남한 땅에 묻히게 됐습니다. ‘죽어서 날아가마’ 했던 시인님은 그렇게 그리워하던 느릅나무를 만났을까요? 어머니 품에 안겼을까요?

인격과 품성의 잘못은 나 자신에게 책임이 있지만 다른 한편 절반의 책임은 분단에 있다고 믿는다.
민족의 분단이 인간의 진정한 삶을 이같이 왜곡해 왔다.
통일이 없이는 인간교육과 문화, 아름다운 사회의 건설은 지난한 과제다.

- 김규동 시집 「느릅나무에게」의 ‘시인의 말’ 중에서


이렇게 시인님은 일상에 묻혀 있던 우리를 문득 일깨워주네요. 여기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며, 통일을 염원하며 외롭게 살다 간 실향민이 있었다고요. 아니, 지금도 우리 가까이  있다고요. 부디 이들이 고향에 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요. 꿈에도 그리운 가족을 만나게 해 달라고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김규동 시인님의 시 ‘해는 기울고’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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