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시인님의 시 '봄비'를 맞습니다. 김소월 시인님의 봄비는 어떤 봄비일까요? 시인님이 하염없이 내려주는 '봄비'를 맞으며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소월 시 '봄비' 읽기
봄비
- 김소월
어룰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
어룰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
서럽다, 이 나의 가슴속에는!
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
그러나 해 늦으니 어스름인가.
애달피 고운 비는 그어오지만
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앉아 우노라.
(아래는 시 ‘봄비’의 원본)
어룰업시지는꼿츤 가는봄인데
어룰업시오는비에 봄은우러라
서럽다, 이나의가슴속에는!
보라, 놉픈구름 나무의푸릇한가지.
그러나 해느즈니 어스름인가.
애달피고흔비는 그어오지만
내몸은꼿자리에 주저안자 우노라.
- 「김소월전집」(김용직 편저, 서울대학교출판부) 중에서(※위 원본 표기 중 '꼿'의 'ㄲ'은 원본에는 'ㅅㄱ'으로 되어 있음)
2. '어룰없이'에 담긴 시인의 눈짓은?
오늘 만나는 김소월 시인님(1902~1934)의 시 '봄비'는 온통 눈물이 가득하네요.
봄은 울어라(2행), 서럽다(3행), 주저앉아 우노라(7행)
- 김소월 시 '봄비' 중에서
이렇게 울음이 시 전체에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봄비처럼요. 그런데 이 울음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시인님에게 그 해 봄비는 왜 그리 슬픈 눈물이었을까요? 시인님의 슬픔을 이해하면 이 시 '봄비'가 우리 가슴으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어룰없이
- 김소월 시 '봄비' 중에서
「김소월전집」(김용직 편저, 서울대학교출판부)에 따르면, '어룰'은 '얼굴'의 평안도 방언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룰없이'는 '얼굴없이'가 됩니다. 그런데요, 왜 시인님은 이 시에서 '어룰없이'라는 표현을 1행과 2행에 잇달아, 그것도 첫머리에 썼을까요? 이 표현은 시인의 중요한 눈짓일 것만 같습니다.
김소월 시인님은 생전에 단 한 권의 시집 「진달래꽃」(매문사)을 출간했습니다. 그 해가 시인님 나이 24세 때인 1925년입니다. 이 시집에는 모두 126편의 시가 실렸습니다. 오늘의 '봄비'는 37번째 순서로 실린 시입니다. 「진달래꽃」 시집이 발간된 1925년 12월 이전에, 그러니까 '봄비'가 쓰였을 즈음에는 시인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시인님의 슬픔과 관련된 일 말입니다.
위 책에 실린 김소월 시인님의 연보를 잠깐 볼까요? 시인님은 1923년 3월 22세 때 서울의 배재고보를 졸업합니다. 그 해 4월에는 일본동경상대에 입학하는데요, 9월에 일어난 관동 대지진으로 귀국한 이후 학업을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일본 유학 중단에 대한 아쉬움과 자책감은 김소월 시인님에게 평생 한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고 하는데요, 김소월 시인님은 집안을 일으킬 마지막 희망이었고, 그의 유학에는 많은 돈이 들어갔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니 중도에 빈손으로 귀국해야했던 김소월 시인님에게는 그후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든 시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김소월 시인님에게는 오산학교 시절 사귀었다고 전해지는 연인과의 실연도 커다란 상처로 가슴 깊이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어룰없이
- 김소월 시 '봄비' 중에서
시로 가는 창문은 여러 개가 있겠지만요, 여러 정황으로 보아 빗방울이네는 이 표현에서 먼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는 느낌이 물씬 납니다. '볼 낯이 없다'는 뜻 말입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지금 나의 곁에 없다'는 느낌도 겹쳐 일어나네요.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이 없는 봄이면 어떤 기분이겠는지요? 두 경우 모두 참담한 상황입니다. 그런 시인님의 처지가 우리에게로 옮겨오는 것만 같습니다.
어룰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 / 어룰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
- 김소월 시 '봄비' 중에서
그렇게 희망이 꺾여버린 처지의 시인님에게 세상은 온통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것만 같습니다. 세상은 초록초록 피어나고 약동하는 봄인데, 그런 봄을 온몸으로 느낄 기운도 없이 '지는 꽃'을 보니 그저 봄이 가는가 하고 느껴질 뿐입니다.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 하고 말하고 있지만 어찌 봄이 울 수 있겠는지요? 꽃은 지고 봄은 가는데 거기에다 봄비가 오네요. 봄이 우는 게 아니라 시인님이 울고 있습니다.
3. 울고 나면 누구라도 푸릇푸릇해지기를!
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 / 그러나 해 늦으니 어스름인가
- 김소월 시 '봄비' 중에서
이 구절은 약동하는 봄 하늘의 기운이기도 하고, 시인님이 품었던 꿈과 희망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무언가 때가 지나가버렸음을 절감합니다. 어스름 녘 옅은 어둠이 주위에, 시인님의 마음에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울었을까요?
애달피 고운 비는 그어오지만 / 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앉아 우노라
- 김소월 시 '봄비' 중에서
봄비는 잠시 그쳤다 다시 오다 하지만 시인님의 울음은 그칠 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 울음을 주저앉아 운다고 하네요. 그것도 꽃자리에서요. 꽃이 달렸다가 떨어진 빈자리에 말입니다. 꿈이 달려있다 날아가버린 그 허허로운 자리에 말입니다. 사랑이 피었다 져버린 그 아픈 자리에 말입니다.
아픔이 많은 우리도, 그래서 저마다의 꽃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우리도 시인님처럼 울고 싶습니다. 실컷 울면 서러움이 좀 나아지겠지요? 이렇게 울고 나면 누구라도 부디 봄비 맞은 나뭇가지처럼 푸릇푸릇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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