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 시인님의 시 '윤사월'을 만납니다. 우리를 순간 이동시켜주는 마법을 가진 시입니다. 일상을 벗어나 조용한 공간으로 가고싶다면 천천히 읽어보기 바랍니다. 거기에 시인님이 구축해 놓은 적막의 공간, 생명의 공간이 있으니까요. 우리 함께 이 시를 읽으며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해보십시다.
1. 박목월 시 '윤사월' 읽기
윤사월(閏四月)
- 박목월
송화(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오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직이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 「박목월 시 전집」(이남호 엮음·해설, 민음사) 중에서
이 시는 '나그네'와 함께 박목월 시인님(1916~1978) 초기 시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1946년 조지훈·박두진 시인님들과 함께 만든 3인 시집 「청록집」에 실려 있습니다. 해방 직후 우리네 살림이 매우 어려운 시대에 쓰인 시네요.
이 시의 제목('윤사월')에서부터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곤궁함이 전해집니다. 음력 4월, 아직 보리는 익지도 않았고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그래서 생활이 어려웠던 시기입니다. 이때를 춘궁기(春窮期), 바로 보릿고개라 합니다. 윤달이 들어 4월이 한번 더 이어지니 심적으로도 견디기가 더욱 힘든 시간입니다. 배가 너무 고파 더디 가는 봄을 원망했을 시간이었겠네요.
2. '눈먼 처녀'가 등장한 까닭은?
왜 시인님은 이 시에 '눈 먼 처녀'를 등장시켰을까요? 가난한 산지기의 딸이네요. 유종호 문학평론가님에 따르면, 1944년 발간된 「조선의 자연과 생활」(하사마 분이치)에는 해방 직전 전국 시각장애인은 2만 명이고 안과전문개업의는 20명이며 그중 8명이 서울에 있었다고 합니다.(한국일보 2009.12.14).
그런 상황에서 식량이 부족해 제대로 젖도 못 먹고 자란 아이들이 영양부족으로 안질환이 생기면 제때 치료나 받을 수 있었을까요? 유 문학평론가님은 윤사월에 등장하는 '눈먼 처녀'도 그런 유아기 안질환의 희생자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깊은 산속에 외따로이 살면서 남의 묘를 돌봐주는 일을 하며 먹고사는 산지기의 사정으로는 딸이 아파도 얼마나 속수무책이었겠는지요?
이런 사연을 마음에 담고 시 '윤사월' 속으로 들어가는 우리의 마음은 벌써부터 흔들리네요. 그런데요, 우리는 한 번쯤 이런 공간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는 것만 같습니다. 안팎의 소음 속에 파묻혀 살고 있는 우리는 시인님이 구축해 놓은 깊고 고요한 공간에 들어가 그 적막함, 그 애절함과 동행하면서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마음을 씻을 필요가 있는 것만 같습니다. 고요히 천천히 시를 한 줄씩 읽으면서요.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오리
- 박목월 시 '윤사월' 중에서
때는 소나무 꽃가루인 노란 송화가루가 날리는 봄입니다. 장소는 '외딴 봉오리'이니 사람이 잘 찾지 않는 깊은 산속이네요. 그러니 얼마나 고요할까요? 송화가루가 흩날리는 소리마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솔바람 소리 말입니다. 그대도 지금 듣고 있지요?
윤사월 해 길다 / 꾀꼬리 울면
- 박목월 시 '윤사월' 중에서
봄이 깊어질수록 해는 점점 길어지고 있습니다. 보릿고개여서 배는 점점 고파지고 있고요. 시간이 멈춰있는 듯 느리게 흐르고 공간 속의 사물들도 정지된 느낌을 주네요. 그 순간, 꾀꼬리가 웁니다. 꾀꼬리 소리는요, 정말 티없이 맑고 아름답습니다. 봄의 숲속에서 가장 도드라지게 들리는 소리입니다. 그런 새소리가 공간의 적막을 깨고 온 사방으로 퍼져나갑니다. 얼마나 아름답겠는지요?
3. 77년의 시공을 건너온 솔향과 꾀꼬리 울음소리
산직이 외딴 집 / 눈먼 처녀사
- 박목월 시 '윤사월' 중에서
여기까지 와보니 우리도 문득 '눈먼 처녀'의 입장이 되고 맙니다. 이 3연이 이 시의 울음터입니다. 해는 길고 몸은 허기진 힘든 봄날 → 외딴 봉오리 → 외딴 집 → 외딴 사람, 눈먼 처녀가 있네요. 그녀는 눈이 멀었기 때문에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방안에서 외따로이 지냈을 것입니다. 앞을 볼 수 없는 그녀는 온통 어둠 속에 갇혀 삽니다. 밖에 봄이 오는지 꽃이 피는지 알 수 없이요. 얼마나 적막하겠는지요? 그 적막과 어둠의 순간, 꾀꼬리가 울었습니다. 눈먼 처녀의 입장이 된 우리의 귀도 쫑긋해지네요. '처녀사'에서 '사'는 '물론'이나 '당연히'를 뜻하는 '야'의 경상도 방언으로 읽힙니다.
문설주에 귀 대이고 / 엿듣고 있다
- 박목월 시 '윤사월' 중에서
여기서 잠시 우리도 눈을 감고 주변의 사물을 귀와 마음으로 읽어 봅시다. 청각이 더욱 예민해진다는 것을 금방 느낍니다. '눈먼 처녀'는 이미 송화가루에서 솔향을 맡았겠네요. 꾀꼬리나 송화가루는 약동하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그 소리와 향이 사방으로 퍼지고 있네요. '눈먼 처녀'의 내면에도 그 생명의 향과 소리가 가득 차올랐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지금 온 마음으로 생명과 교감하고 있습니다.
문설주는 문을 지탱하는 두 기둥을 말합니다. 그 문설주에 귀를 대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 '눈먼 처녀'는 살며시 일어서는 중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시인님은 그녀가 '엿듣고 있다'고 한 뒤 시를 마칩니다. 이 시를 읽는 우리도 '눈먼 처녀'의 입장이 되어 계속 엿듣고 있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네요.
외딴 공간에 가득 차오른 솔향과 꾀꼬리 울음소리는 경계를 넘어 '눈먼 처녀'의 내면에 가득 차고, 또 어쩌지 못하고 이렇게 '눈먼 처녀'의 입장이 된 우리의 내면에도 차오르기 시작하네요. 지금 우리는 이 시가 탄생한 1946년부터 77년의 시공을 지나온 솔향과 꾀꼬리 울음소리를 마음으로 교감하고 있습니다. 세월 지나도 변함없이 정다운 향과 소리. 애절함과 고독의 틈을 비집고 발밑에서부터 사물사물한 봄기운이 차오르네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박목월 시인님의 시 한 편 더 읽어보세요.
2023.04.20 - [읽고 쓰고 스미기] - 박목월 시 봄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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