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시인님의 시 '오미자술'을 마셔봅니다. 이 시에는 어떤 삶의 풍경이 들었을까요? 시인님이 건네주는 예쁜 색깔의 '오미자술'을 받아 함께 읽으며 마시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황동규 시 '오미자술' 읽기
오미자술
- 황동규(1938~ , 서울)
오미자 한줌에 보해소주 30도를 빈 델몬트 병에 붓고
익기를 기다린다.
아, 차츰차츰 더 바알간 색,
예쁘다.
막소주 분자(分子)가
설악산 오미자 기개에 눌려
하나씩 분자 구조 바꾸는 광경.
매일 색깔 보며 더 익기를 기다린다.
내가 술 분자 하나가 되어
그냥 남을까 말까 주저하다가
부서지기로 마음먹는다.
가볍게 떫고 맑은 맛!
욕을 해야 할 친구 만나려다
전화 걸기 전에
내가 갑자기 환해진다.
- 황동규 시집 「몰운대행(行)」(문학과지성사, 1991년 초판·2쇄) 중에서
2. 오미자술을 담고, 기다리고, 부서지는 '레시피'에 대하여
시 '오미자술'은 황동규 시인님 50대 초반 즈음의 시네요. 시인님이 직접 담가주신 '오미자술', 어서 마셔봅시다.
오미자 한줌에 보해소주 30도를 빈 델몬트 병에 붓고 / 익기를 기다린다
- 황동규 시 '오미자술' 중에서
이건 시(詩)의 첫 줄이라도 어쩌면 레시피입니다. 오미자술 담그기 레시피 말입니다. 시인님의 오미자술 담그는 법을 그대로 따라 하고 싶네요.
시인님 레시피처럼 오미자 한 줌(더도 덜도 말고)에 보해소주(다른 소주 말고) 30도(12도짜리 말고)를 빈 델몬트 병(다른 유리병 말고)에 붓고 싶네요. 그러면 시인님이 담가드신 그 맛 그대로 나겠지요?
이렇게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하는 행위를, 구체적인 사물들을 전면에 내세워 시를 마주한 우리를 스스럼없고 다정하게 하네요. 이미 ‘독서목욕’에서 맛보았지만, 이 수법은 황동규 시인님 전매특허 아닌가요? 첫 줄에서 마음 빗장 다 풀린 우리는 그다음이 궁금해서 눈을 뗄 수가 없네요.
아, 차츰차츰 더 바알간 색, / 예쁘다.
- 황동규 시 '오미자술' 중에서
'예쁘다.'를 별도의 행으로 배치했네요. 이건 이럴만했어요, 시인님. 오미자의 예쁜 빛깔엔 이만한 대우 해야죠. 얼마나 예쁘다고요.
그 아련한 붉은색이 점점 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오미자는 지난여름 내내 그 조그맣고 동글동글한 열매에 얼마나 많은 붉음을 모아두었던 걸까요? 어디서, 또 어떻게요? 참으로 대견한 오미자네요.
막소주 분자(分子)가 / 설악산 오미자 기개에 눌려 / 하나씩 분자 구조 바꾸는 광경
- 황동규 시 '오미자술' 중에서
우리는 '소주 분자(分子)'를 주어로 한 최초의 시를 읽게 된 건가요? '소주 분자'가 '오미자 기개'에 눌렸다고 하네요. 그것도 '설악산 오미자 기개'에요. 그래서 '막소주 분자'는 '하나씩 분자 구조'를 바꾸고 있다고 합니다. 시인님, 지금은 화학시간인지요? 평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분자 구조 바꾸는 광경이라니요? 아, 막소주 색깔이 점점 붉어지고 있다고요? 잘 알겠습니다, 시인님!
매일 색깔 보며 더 익기를 기다린다
- 황동규 시 '오미자술' 중에서
대체 시는 언제 쓰시려고 시인님이 이렇게 델몬트 병 앞을 서성이는 겁니까? 그것도 매일!
왜 시인님은 '매일 색깔 보며 더 익기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맛보고 싶어서요. 여러분은 지금 오미자 열매와 막소주를 넣은 델몬트 병을 거실 책장 위에 올려놓고, 오며 가며 그것을 바라보며 오매불망 술이 익기만을 기다리는 50대 초반의 황동규 시인님을 보고 계십니다. 군침을 삼키면서요.
내가 술 분자 하나가 되어 / 그냥 남을까 말까 주저하다가
- 황동규 시 '오미자술' 중에서
오미자술이 다 익은 걸까요? 보통 오미자술은 담근 지 3개월쯤 지나야 먹을 수 있다는데 아마 시인님은 1개월도 못 버텼을 것만 같네요. 아니면 열흘쯤 후에?
시인님은 망설입니다. 저 오미자술을 마실 것인가, 말 것인가?
3. '부서지기로 마음먹는다'
시 '오미자술'이 실린 시집(「몰운대행」)의 다른 시를 잠시 만나 봅니다.
찬 소주를 마신다, 1/10병이 될 때까지 / 물끄러미 남은 술을 들여다본다
- 황동규 시 '봄밤에 쓰다' 중에서
이 시 속에서 시인님은 한밤에 고(故) 박정만 시인님의 선시집(選詩集)을 엮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소주를 마시고 있네요. '1/10병'까지만 먹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나 봅니다. 그러나 갈등이 일고 있네요. 저걸 어째? 저 다디단 걸?
내 언제 술의 양 재는 소심증 버리고 / 안 마셔도 허허롭고 마셔도 허허로운,
답답하면 숨 쉬고 편해도 숨 쉬는, / 그런 못된 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 황동규 시 '봄밤에 쓰다' 중에서
'술의 양 재는 소심증'. 시인님은 이런 '소심증'을 버리고 '안 마셔도 허허롭고 마셔도 허허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 걸까요? 그러나 그렇게 달관한 사람을 시인님은 '못된 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소심증'을 가진 자신을 괜찮다고 토닥이는 걸까요? 그리하여 시인님은 남은 '1/10병'도 기어이 비웠겠네요. 우리는 이렇게 털털한 시인님을 사랑할 수밖에요.
아, 그 델몬트병에 담근 오미자술, 기어이 마셨을까요?
부서지기로 마음먹는다 / 가볍게 떫고 맑은 맛!
- 황동규 시 '오미자술' 중에서
또 기어이 마시고야 말았네요!
그래, 나도 부서지자. 오미자 기개에 눌려 소주가 분자 구조를 바꾸는 것처럼, 나도 소주 분자에 녹아들자. 소주 분자에 깊게 스미자. 소주 분자와 한바탕 놀자.
어디 소주 분자에만 녹아들 일인가. 타자(他者)에게, 사물에게, 세상에, 우주에!
'나'라는 경계를 넘자, 울타리를 허물자. 내가 있다는 것, 나의 자아가 있다는 것, 나의 소유가 있다는 생각을 버리자.
욕을 해야 할 친구 만나려다 / 전화 걸기 전에 / 내가 갑자기 환해진다
- 황동규 시 '오미자술' 중에서
그렇게 내가 부서지면 다 해결되는 것을, 타자는 나의 존재의 이유인 것을, 그렇게 고마운 존재에게 왜 욕을 한단 말인가, 하셨을까요?
'환해진다'는 표현 참 좋아하시는 시인님! 이 시를 읽고 나니 빗방울이네도 환해집니다.
그리하여 '술의 양 재는 소심증'이 있는 빗방울이네도 이 밤 '부서지기로 마음'먹습니다. '소주 분자'에 스미기로 합니다. (이렇게 부서져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귀책사유는 상당부분 시인님께 있음을 사전에 공지하오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캄캄한 삶의 길, 언제나 환하게 보여주시는 시인님을 위하여!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황동규 시인님의 시 '귀뚜라미'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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