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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박진규 시 10월의 문진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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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시인님의 시 '10월의 문진'을 만납니다. 이 시에는 어떤 삶의 풍경이 깃들어 있을까요? 우리 함께 시를 읽으며 상수리나무의 문진(問診)을 받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박진규 시 '10월의 문진(問診)' 읽기

 

10월의 문진(問診)

 

- 박진규(1963~ , 부산)

 

도토리 한 개가 정확히 목덜미 중간에 떨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높은 상수리를 올려다본다

한번 찔러보고 어찌 하나 보려는지

상수리는 조용히 하늘만 보고 있다

그제야 나는 굴러가던 도토리를 번호표처럼 손에 쥐고

늙은 상수리의 처방을 기다리는데

나만 모르는 중요한 일 있는지 얼씬도 않는 오후

담벼락에는 호박넝쿨이 기진맥진한 채 늘어져 있다

장미도 이제는 뼈밖에 남지 않았다

모두 궁지(窮地)로 가는 길이다

문득 손 안에서 따뜻해진 도토리

상수리가 볼 수 있는 숲까지 힘껏 던져주었다

 

- 박진규 시집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신생, 2016년 1쇄, 2017년 2쇄) 중에서

 

2. 어디가 아파서 누구로부터 문진을 받았을까요?

 

시 '10월의 문진(問診)'에서 '문진(問診)'은 의사가 환자에게 현재 몸의 상태나 발병 시기, 환자 자신과 가족의 병력 등을 물어보고 진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제목 '10월의 문진(問診)'은 10월에 받아본 진단 정도로 새겨봅니다. 시의 화자는 어디가 아파서, 누구로부터 '문진(問診)'을 받았을까요?

 

도토리 한 개가 정확히 목덜미 중간에 떨어졌다

- 박진규 시 '10월의 문진(問診)' 중에서

 

이 첫 행이 시가 발아된 사건이겠네요. 시의 화자가 길을 가고 있는데 목덜미에 무언가가 '톡' 떨어졌네요. 목덜미에 떨어졌다는 말은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는 말이겠네요. 시의 화자는 무언가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걸까요? 이 스산한 가을날에 땅을 쳐다보며 터벅터벅 걷고 있었네요.

 

그때 무언가가 목덜미에 떨어졌네요. 누군가 아는 체하며 목덜미를 '톡' 치듯이 말입니다. 목덜미를 친 뒤 바닥에 또르르 구르고 있는 것, 바로 도토리였네요.

 

'정확히 목덜미 중간에'. 이 구절이 이 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어깨 부근이나 머리에 떨어졌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요, 이렇게 '정확히 목덜미 중간에' 도토리가 떨어진 사건은 시의 화자에게 각별한 생각을 갖게 할 만합니다.

 

누군가가 일부러 기다리며 벼르고 있다가 아주 '정확히 목덜미 중간에' 도토리를 떨어뜨린 것으로,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인 시의 화자는 생각하게 되었네요. 어, 이건 예삿일이 아닌데? 

 

나는 반사적으로 높은 상수리를 올려다본다

- 박진규 시 '10월의 문진(問診)' 중에서

 

그래서 시의 화자는 도토리가 온 쪽,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반사적으로' 올려다보네요. 거기 상수리나무가 있었네요. 도토리 어머니 말입니다. 상수리나무님, 왜 저를 부르셨나요? 무슨 일 있는지요?  

 

한번 찔러보고 어찌 하나 보려는지 / 상수리는 조용히 하늘만 보고 있다

- 박진규 시 '10월의 문진(問診)' 중에서

 

그러나 상수리나무는 대답이 없습니다. 대답 대신 '조용히 하늘만 보고 있다'라고 합니다. 저렇게 늘 푸르고 깊고 시린 하늘을 이고 사는 상수리나무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걸까요? 삶의 길, 좋은 삶으로 가는 길 말입니다. '한번 찔러보고 어찌 하나 보려는지'. 이 구절에서 시의 화자는, 모든 걸 다 알고 있을 것만 같은 상수리나무가 자신에게 일부러 말을 걸고 있다고 여기게 되었네요.

 

그제야 나는 굴러가던 도토리를 번호표처럼 손에 쥐고 / 늙은 상수리의 처방을 기다리는데

- 박진규 시 '10월의 문진(問診)' 중에서

 

'정확히 목덜미 중간에' 떨어뜨린 도토리는 상수리나무가 나누어주는 '번호표'일까요? 삶의 고통을 참고 있는 이들을, 지독한 고독에 빠져있는 이들을 문진 해주려고, 그 문진 순서를 적은 '번호표' 말입니다. 상수리나무님, 대체 어찌 살아야 하나요?

 

박진규시10월의문진중에서
'숲까지 힘껏 던져주었다' - 박진규 시 '10월의 문진' 중에서.

 

 

3. '상수리가 볼 수 있는 숲까지 힘껏 던져주었다'

 

나만 모르는 중요한 일 있는지 얼씬도 않는 오후

- 박진규 시 '10월의 문진(問診)' 중에서

 

가을날 오후의 적막을 아시나요? 여름날의 성장과 열정이 식은 가을날 오후의 적막 속에서는 생명들이 말라가는 냄새가 나는 것만 같습니다. 이 고요의 풍경 속에서는 사물이 더 가까이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너무나 고요하여 그동안 보이지 않던 사물들의 내면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 같습니다.

 

담벼락에는 호박넝쿨이 기진맥진한 채 늘어져 있다 / 장미도 이제는 뼈밖에 남지 않았다 / 모두 궁지(窮地)로 가는 길이다

- 박진규 시 '10월의 문진(問診)' 중에서

 

여름날의 그 청청했던 수목들은 이제 잎을 떨어뜨리며 쇠락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봄부터 여름, 그리고 가을에 이르기까지 언 가지를 녹여서 잎을 피우고 또 그 잎 사이로 꽃을 피웠습니다. 그 꽃을 매개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과정은 뜨거운 열병을 앓는 일이었을 것만 같습니다.

 

호박이나 장미, 그 말고도 수많은 생명들은 이 처절한 가을의 궁지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내년이면 다시 꽃 피우고 열매 맺겠지요? 도토리를 손에 쥐고 있던 시의 화자는 그제야 자연의 쉼 없는 순환과 말없는 수고를 알아차린 것 같네요. 그러면서 자신도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 속에서 수많은 생명들과 더불어 순환하는 존재라는 사실도요.

 

문득 손 안에서 따뜻해진 도토리 / 상수리가 볼 수 있는 숲까지 힘껏 던져주었다

- 박진규 시 '10월의 문진(問診)' 중에서

 

시의 화자는,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상수리나무에게 문진료를 지불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까요? 상수리나무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 숲까지 도토리를 힘껏 던져주는 일은 상수리나무에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는지요? 그것도 그 도토리에서 어린 상수리나무 싹이 나고 키가 쑥쑥 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숲이라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지요? 이로써 상수리나무에게 내야 할 문진료를 아주 알맞게 다정하게 갈음했네요.

 

'힘껏 던져주었다'. 이 마지막 구절에서 시의 화자의 고독도 자연 속으로 힘껏 던져져 소멸되는 느낌을 받게 되네요. 참으로 상수리나무는 훌륭한 자연의 의사인 것만 같습니다. 이 가을, 우리도 상수리나무 의사님을 찾아가 문진(問診) 한번 받아보는 건 어떨까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박진규 시인님의 시 '화엄사 중소'를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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