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시인님의 시 '파초우(芭蕉雨)'를 만납니다. 억압과 굴종의 현실을 벗어나 청정무구한 자연에 동화되고 싶은 마음을 담은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조지훈 시 '파초우' 읽기
파초우(芭蕉雨)
조지훈(1920~1968, 경북 영양)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비ㅅ방울
파초ㅅ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조 앉어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츰 나의 꿈을 스쳐 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조지훈 시선」(오형엽 해설, 지식을만드는지식, 2011)
2. 서울 남산의 시비(詩碑)에 새겨진 조지훈 시는?
조지훈 시인님의 시비(詩碑)가 1972년 서울 남산에 세워졌습니다. 거기 새겨진 시가 '파초우(芭蕉雨)'입니다.
조지훈 시인님 타계(1968년) 후 시인님이 교수로 재직했던 고려대 동료들과 제자들이 세운 시비입니다.
그만큼 시 '파초우(芭蕉雨)'가 수많은 시 가운데 시인님의 정신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시라는 뜻일 것입니다.
시의 제목인 '파초우(芭蕉雨)'는 '파초'에 내리는 '비'를 말합니다.
파초는 커다란 화분이나 화단에 관상용으로 흔히 키우는 멋진 식물입니다.
파초는 넓적하고 기다란 잎사귀를 가졌습니다. 바나나 잎사귀 같이 생겼고요.
'파초우(芭蕉雨)'라는 제목에서 널따란 파초 잎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네요.
이 작품이 쓰인 때는 1942년입니다.
「승무의 긴 여운, 지조의 울림 - 아버지 조지훈 삶과 문학 정신」(조광렬 지음)에 시 '파초우'에 대한 사연이 나오네요.
이에 따르면,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편찬에 참여했던 시인님은 1942년 일제의 조선어학회 검거 선풍에 의해 서울에서 경주로 내려가게 됩니다.
이 즈음 쓰인 작품이 바로 '파초우' '완화삼' 같은 방랑적 서정의 시편들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1942년이니 시인님 22세 때입니다.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은 시인님 자신일 것입니다.
일제의 억압 아래 현실에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하고 정처없이 떠도는 구름 같은 방랑자의 신세입니다.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망국(亡國)의 고통과 슬픔 속에 지친 이 심신을 쉬어갈 곳이 어디에라도 있을 것인가?라고 시인님은 자신에게 묻고 있는 것만 같네요.
'성긴 비ㅅ방울 / 파초ㅅ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때는 저녁 어스름입니다.
치마폭처럼 너울거리는 파초 잎사귀에 빗방울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네요.
후둑후둑!
슬픔과 고독에 빠진 시인님에게 들리는 빗소리입니다.
그런 때 들리는 빗소리는 잠들어 있던 정신을 깨어나게 하는 죽비소리 같은 것일까요?
슬픔과 고독에 빠진 마음을 두드려 깨우는 각성의 소리 말입니다.
'창 열고 푸른 산과 / 마조 앉어라'
널따란 파초 잎사귀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창밖에서 난 것이었네요.
후둑후둑, 그 빗소리는 자연이 우리에게 보내는 알람일까요?
지금 너를 옭아매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보라는 신호 말입니다.
시인님은 그 빗소리에 마음이 깨여 창을 열었네요.
'푸른 산'. 그냥 산이 아니라 '푸른 산'입니다.
'푸른 산'은 인간계의 욕망과 갈등이 없는 순수의 세계입니다.
'마조 앉어라'. 이 구절은 시인님이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이겠지요?
창밖의 '푸른 산'을 향해 가부좌를 하고 앉아 명상에 잠겨있는 시인님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은 경건한 구절이네요.
3. 현실을 떠나 자연에 동화되고 싶은 꿈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이 구절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시인님의 다른 시 '산길'에 나오는 구절을 읽어봅니다.
'바다로 흘러가는 산골 물소리만이 깊은 곳으로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 그저 아득해지는 내 마음의 길을 열어준다'
▷조지훈 시 '산길' 중에서
시인님에게 '산골 물소리'는 '마음의 길'을 열어주는 소리입니다.
욕망과 갈등의 세계에서 혼탁해진 마음을 씻어주는 소리입니다.
그렇기에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입니다.
그 물소리가 있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입니다.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욕망과 갈등의 세계를 훨훨 벗어나 청정무구한 자연, '푸른 산'을 지향하는 시인님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구절입니다.
'온 아츰 나의 꿈을 스쳐 간 구름 /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1연에 등장했던 이 구절이 다시 5연에서 반복되고 있네요.
그만큼 이 구절에 시인님의 마음이 많이 담겨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이 밤'은 구름처럼 정처 없이 방랑하는 시인님이 처한 현실이네요.
일제 암흑기의 시간, 청년의 꿈과 이상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던 억압의 시간이었습니다.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시인님에게 여전히 정착하여 쉴 곳 없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네요.
그 힘든 시간이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시인님의 깊은 한숨이 느껴지는 구절입니다.
'온 아츰 나의 꿈을 스쳐 간 구름'. '온'은 '전부의, 모두의'의 뜻으로 새깁니다.
아침 내내 시인님은 꿈을 생각하고 있었네요.
굴종과 억압의 현실에서 벗어나 자연과 교감하며 자연에 동화되고 싶은 것이 시인님의 간절한 꿈이었을 것만 같습니다.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이 구절을 소리내어 읽으니 우리도 구름처럼, 시인님처럼 정처없이 방랑하는 신세인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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