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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백석 시 산숙

by 빗방울이네 2024.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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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인님의 시 '산숙(山宿)'을 만납니다.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맑게 씻어주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산숙(山宿)' 읽기

 

산숙(山宿)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여인숙(旅人宿)이라도 국숫집이다

모밀가루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 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나가 누워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木枕)들을 베여보며

이 산(山)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木枕)들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골과 생업(生業)과 마음들을 생각해본다

 

▷「정본 백석 시집」(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19년 32쇄) 중에서.

 

2. 모밀 냄새가 솔솔 풍기는 특별한 시

 

'산숙(山宿)'의 '宿'은 '자다, 숙박하다' 또는 '숙소, 여관' 같은 뜻을 가집니다.

 

시인님은 이렇게 산(山)에 숙(宿)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사전에는 없는, 울림 있는 독특한 제목을 달았네요. 

 

'산숙(山宿)'은 글자 그대로 새기면 산골에 있는 여관 또는 그런 여관에서 자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뜻 말고도 무언가 산에 온몸이 푹 파묻히는 느낌, 산과 하나 되는 느낌이 일어나는 제목이 '산숙(山宿)'이네요.

 

이 시는 1938년 3월 「조광」에 발표된 시입니다. 시인님 26세 즈음이네요.

 

어떤 시일까요?

 

'여인숙(旅人宿)이라도 국숫집이다'

 

이 첫 행은 '연인숙인데 국수도 파는 집이다'라는 뜻이겠네요. 그런데 그렇게 썼으면 얼마나 심심하겠는지요?

 

앞뒤를 잇는 '~이라도'라는 보조사의 등장으로 이 첫행은 다소 복잡하고도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킵니다.

 

'여인숙이지만 여인숙만이 아니라 국숫집이기도 하다'라는 의미에서 '산속 허름한 여인숙으로 보일 지라도 맛있는 국수를 내는 국숫집이기도 하다'라는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만 같습니다. 

 

시인님은 그래서 그게 좋다는 뉘앙스가 느껴지네요. 여인숙보다 국수에 방점이 찍혔다고 할까요? 

 

'모밀가루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 하다'

 

모밀은 메밀의 방언입니다. 모밀은 '모가 난 밀'이라는 말인데, 표준어인 메밀보다 의미가 시각적으로, 더 직관적으로 다가와서 좋기도 하네요.

 

'모밀가루포대'. 이 구절로 보아 첫 행의 '국숫집'은 모밀로 만드는 모밀국수를 내는 집이네요.

 

시인님은 지금 '모밀가루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에 있습니다. 아래채가 있고 웃채가 있는 여인숙이네요. '웃간'은 윗채에 있는 방이겠습니다.

 

'들믄하다'는 말은 '불을 많이 때어 온돌방이 지독하게 덥다'는 뜻입니다(「평북방언사전」, 김이협 편저).

 

그러니 '들믄들믄'이라는 부사어에서 더운 방에 들어갔을 때의 온기(溫氣)가 훅 끼칩니다. 

 

그런데요, '모밀가루포대가 그득하니' 쌓여있는 방이 '더웁기도 하다'라고 하니까 이 구절에서 모밀내가 솔솔 풍기는 것만 같습니다. 

 

모밀냄새는 구수하면서 깊고 정다운 맛이겠지요?

 

시인님은 모밀냄새라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신비롭게도 우리는 이렇게 그 냄새를 떠올리게 되네요. '들믄들믄' 때문이네요.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나가 누워서'

 

'국수분틀'은 국수를 뽑는 틀입니다. '분틀'을 그냥 '국수틀'이라고도 하네요(「평북방언사전」).

 

분은 가루 '粉(분)'이겠지요? 모밀가루를 반죽해서 이 분틀에 넣어 공이를 누르면 촘촘한 구멍사이로 국수가 나오겠네요.

 

그런 고마운 분틀이 낡아 '웃간'에 모셔져 있었네요.

 

'그즈런히'는 '가지런히'일텐데요, 어쩐지 '가지런히'보다 여유 있고 따뜻하고 다정한 느낌이 드네요.

 

시인님의 다른 시에도 이 정다운 '그즈런히'가 등장합니다.

 

'그즈런히 손깍지 벼개하고 누어서 이 못된 놈의 세상을 크게 크게 욕할 것이다'

▷백석 시 '가무래기의 낙(樂)'

 

'그즈런히 손깍지 벼개하고' 누운 듯한 가무래기의 여유만만한 모습이 눈에 보일 듯하네요.

 

다시 '산숙(山宿)'으로 옵니다.

 

이렇게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나가' 누운 시인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낡은 국수분틀과 나란히 나가 누워보았다는 말, 그 국수분틀이 사람들이 잘 눕지 않는 곳에 있어서 거기까지 '나가' 누워보았다는 말일 텐데요, 시인님이 국수분틀과 자세를 '그즈런히' 하고, 이 국수분틀과 마음도 '그즈런히' 하는 느낌이 전해옵니다. 

 

그래서 국수분틀이 시인님의 오랜 친구 같아 보입니다.

 

낡은 국수분틀이 시인님의 어깨를 감싸줄 것 같아 보입니다.

 

오래되어 낡은, 그래서 이 집 사연을 다 아는 국수분틀이 시인님에게 길고 긴 이야기를 해줄 것 같아 보입니다.

 

사물을 이렇게 친구처럼 다정히 여기는 시간은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시간일지요?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木枕)들을 베여보며'

 

거기 구석에 '목침(木枕)'이 있었네요. 나무를 깎아 만든 베개입니다.

 

'목침들'. 목침이 여러 개 있었네요.

 

그 목침들이 '데굴데굴'한다고 합니다. 바로 놓인 것도 있고, 뒤집어진 것도 있고, 비뚤 하게 놓인 것도 있네요.

 

생김새도 다 달랐겠지요? 시인님은 그 목침들을 베어보았다고 하네요.

 

자려고 목침을 벤 것이 아니라 뒷머리에 닿는 목침의 촉감이 어떤지, 그 촉감이 불러오는 느낌은 어떤 것인지 느껴보았겠지요.

 

나아가 시인님은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그 촉감을 똑같이 느꼈을, 이 목침들을 베고 간 사람들도 떠올렸겠지요?

 

'들믄들믄 더웁기도' 한 '웃간'에 방바닥에 뒹굴거리는 목침처럼 뒹굴거리는 시인님이 저기 보이네요.

 

"새까마니-때를-올리고-간"-백석-시-'산숙'-중에서.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 백석 시 '산숙' 중에서.

 

 

 

3. 산골로 온 사람들의 쓸쓸한 삶의 흔적, 새까만 때

 

'이 산(山)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木枕)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이 구절을 읽으니 예전에 할아버지가 사용하시던 목침이 생각나네요. 그 목침에도 '새까미니 때'가 올라 있었습니다.

 

어린 빗방울이네는 목침을 베면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 시인님처럼 '새까미니 때' 묻은 그 목침을 베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 딱딱한 목침에서 할아버지 냄새가 났던 기억이 나네요.

 

그래서인지 이 구절에서 때 묻은 목침 특유의 오래된 머릿내가 솔솔 나는 것도 같습니다.

 

'목침에 새까미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

 

이 구절은 '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목침을 썼으면 이렇게 때가 새까맣네!' 이런 말이겠네요.

 

이 사람 저 사람의 머릿기름이 묻었고, 그것이 오래되어 새까맣게 되었네요.

 

때를 '묻혔다'라고 하지 않고 '올리고 갔다'라고 하네요. 자신이 이 방을 다녀간 징표를 일부러 남기고 갔다는 뉘앙스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것도 '이 산(山)골에 들어와서' 말입니다. 외지고 험한 산골에 들어온 사람들은, 도회지에서는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이겠지요.

 

그래서 이 5행에서는 그런 가난한 사람들이 이 산골까지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긴 사연들이 읽힙니다.

 

그 사람들이 마을에서 산골로 들어오는 모습과 그들이 마주했을 고된 일, 그 고된 일을 마치고 이 여인숙에서 지친 몸을 쉬면서 모밀국수를 먹었던 저녁들, 목침(木枕)을 베고 누운 밤들의 모습까지 그려집니다.

 

그 명백한 단서가 '목침(木枕)에' '새까미니' 오른 '때'이네요.

 

'그 사람들의 얼골과 생업(生業)과 마음들을 생각해본다'

 

이 구절을 읽으니 시인님의 다른 시 한 구절이 생각나네요.

 

'평안도(平安道)의 어늬 산(山) 깊은 금덤판 /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백석 시 '여승(女僧)' 중에서.

 

이 '금덤판'은 금광의 일터를 뜻합니다. 이 시기에는 일제가 운영하던 금광에 전국의 노동자들이 돈벌이를 하려고 몰리던 때였네요.

 

시 '산숙(山宿)'의 여인숙도 '금덤판' 근처에 자리 잡아 '금덤판'의 노동자들이 머물던 곳일까요?

 

그 '금덤판'은 폐광이 되고 거기 일하던 노동자들이 다른 '금덤판'으로 옮겨가 이 '산숙(山宿)'의 '여인숙'은 한가해진 것일까요?

 

'낡은 국수분틀'과 '새까마니 때'가 오른 '목침들'만 남겨두고 말입니다.

 

시인님은 그 '낡은 국수분틀'과 나란히 누워서 '목침들'을 베어 보면서 생각합니다.

 

'이 산(山)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골과 생업(生業)과 마음들을 생각해본다'

 

냄새도 나고 더럽기도 했을 목침일 텐데요, 시인님은 목침들을 베어보고 '이 목침에 새까미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라고 합니다.

 

그 사람들의 고단한 삶, 그 고단함을 견디며 캐내고 싶었던 꿈과 희망도 생각했겠지요?

 

시인님은 이처럼 주변의 사소한 사물에 눈길이 가고, 마음이 가고, 마침내 동화되고 서글퍼지는가 봅니다. 

 

함께 동행하는 사물과 사람과 그 속에 스민 쓸쓸하고 긴 사연을 이렇게 다정히 어루만지는 시인님이네요.

 

그 깊고 따뜻한 마음이 건너와 우리 마음을 맑혀주네요. 참 개운하네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백석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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