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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조병화 시 봄

by 빗방울이네 2024.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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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시인님의 시 '봄'을 만납니다. 봄날의 설렘, 그 설렘의 이면에 자리한 외로움과 무료함이 가득한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조병화 시 '봄' 읽기

 

 
조병화(1921~2003년, 경기도 안성)
 
화장을 해 본다
새 옷을 입어 본다
구두를 닦아 본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에게
편지를 다시 써 본다
 
연한 바람에 꽃잎이 내리는
유리창 안에 누워
 
어린애를 가진 고양이처럼
나도 그렇게 눈을 감아 본다
 

▷「조병화 시 전집 1」(조병화문집간행위원회, 국학자료원, 2013년) 중에서

 
조병화 시인님은 1921년 경기도 안성 출신으로 1949년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遺産)」을 출간하며 등단했습니다.
등단 이후 「하루만의 위안(慰安)」 「공존(共存)의 이유(理由)」 등 모두 53권의 시집을 출간,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시집을 낸 시인으로 꼽혔습니다.
경희대학교와 인하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세계시인대회 계관시인과 국제이사, 회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후배들을 위해 1991년 편운문학상을 제정했습니다. 경기도 안성 난실리에 조병화문학관이 있습니다.
아세아자유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서울시문화상, 국민훈장 모란장,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습니다.
 

2. 30세 시인이 연분홍 봄날에 한 일은?

시 '봄'은 1951년 나온 조병화 시인님의 세 번째 시집 「패각(貝殼)의 침실(寢室)」에 수록된 시입니다. 
 
시인님이 30세 즈음 쓴 시네요.
 
30세 시인님의 봄날은 어떤 하루일까요?
 
'화장을 해 본다 / 새 옷을 입어 본다 / 구두를 닦아 본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에게 / 편지를 다시 써 본다'
 
봄날입니다.
 
산수유나무에 물이 오르듯 자꾸 몸에 연둣빛 봄물이 차오르는 것만 같은 봄날입니다.
 
저 연두로 뒤덮인 산 너머로 반가운 이가 아지랑이처럼 올 것만 같은 봄날이네요.
 
이 연분홍 설렘을 다들 어찌 갈무리하며 사시는지요?
 
시인님은 어디 좋은 곳에 가려나 봅니다.
 
몸을 씻고요, 얼굴에 스킨로션 바르고요, 새로 사둔 봄옷을 입고요, 구두도 닦는다고 하네요.
 
그런데요, 잘 보셔요.
 
세 가지 행동을 '해 본다' '입어 본다' '닦아 본다'라고 합니다.
 
그냥 한번 그렇게 해본다는 말이네요.
 
실제로 어디 가려는 것은 아니라는 뜻요.
 
갈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 이러면 슬픈 봄날이네요.
 
그대도 이런 적이 있었겠지요?
 
화장을 해 보고, 새 옷을 입어 보고, 구두를 닦아 본 적이 있었겠지요?
 
마땅히 어디 갈 데도 없으면서 말이에요.
 
딱히 누굴 만날 것도 아니면서요.
 
그렇게 차려입고 거울 앞에서 얼마나 예쁜 표정을 지었겠는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이로부터는 기별이 없네요.
 
시인님은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에게' 다시 편지를 씁니다.
 
봄날입니다.
 
그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게로 오고 계시는지요?
 
그대 마음 지금 어디쯤 오고 계시는지요?
 

"어린애를 가진 고양이처럼" - 조병화 시 '봄' 중에서.

 

 
 

 

3. 설레고 외롭고 무료한 어느 봄날의 기록

 
'연한 바람에 꽃잎이 내리는 / 유리창 안에 누워
어린애를 가진 고양이처럼 / 나도 그렇게 눈을 감아 본다'
 
사랑하는 이에게 오십사 하고, 그렇게 애틋한 편지를 쓰는 봄날의 오후입니다.
 
그렇게 간곡한 편지를 쓰는 일 외에 할 일이 없는 봄날의 오후입니다.
 
'연한 바람에 꽃잎이 내리는'.
 
아주 가늘고 약한 미풍(微風)에 꽃잎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렇게 연한 봄바람에 꽃잎이 떨어진다는 것은 시인님의 마음이 그렇다는 말이네요.
 
누가 눈만 징긋해도, 가슴속에 차있는 설움이 왈칵 쏟아질 것 같네요.
 
누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말입니다.
 
그렇게 치장을 하고 갈 데가 없는 시인님은 거실 바닥에 누웠네요. 
 
거실 유리창 밖에는 연한 바람이 불고요, 그 바람에 꽃잎이 내리고요, 햇살이 포근한  봄날의 오후입니다. 
 
이렇게 혼자 있는 봄날은 얼마나 외로운지요.
 
모두 짝을 이루어 꽃놀이를 가는 이런 봄날에 혼자 거실에 누운 시간은 얼마나 낯선 시간인지요.
 
저마다 모두 바쁜 일이 있다는 듯이 전화도 편지도 없는 고요한 봄날입니다.
 
나만 홀로 아득히 먼 곳에 소외되어 있는 듯한 봄날의 정적입니다.   
 
이런 고요함과 무료함을 고양이가 증폭시켜 주네요.
 
'어린애를 가진 고양이처럼'.
 
새끼를 밴 고양이라고 하지 않고 '어린애를 가진 고양이'라는 표현이 참 다정하네요.
 
고양이가 시인님의 소중한 식구라는 느낌이 물씬 풍깁니다.  
 
고양이는 봄의 홍보대사라도 되는가요?
 
시인님은 이렇게 고양이를 등장시켜 봄의 정서를 고조시키네요.
 
봄과 고양이는 어떻게 비슷한가요?
 
부드럽습니다. 연한 바람, 연한 꽃잎, 연분홍과 연두는 얼마나 부드러운지요.
 
고양이 몸의 감촉과 동작들도 세상 부드럽네요.
 
봄과 고양이, 조용하고 편안하고 나른하네요.
 
그 조용하고 편안하고 나른한 기운 속에 내재된 역동성도 둘의 닮은 점입니다.
 
이런 봄날 오후, 시인님은 햇살 좋은 거실 마루에 누웠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봄날의 설렘, 그 이면에 있는 소외의 외로움과 무료함이 함께 마루에 누웠네요.
 
'어린애를 가진 고양이'처럼요.
 
'어린애를 가진 고양이'는 봄날의 햇살을 받으며 졸고 있었겠지요?
 
시인님도 '나도 그렇게 눈을 감아 본다'라고 합니다.
 
시인님이 고양이인지, 고양이가 시인님인지 서로 모를 졸음 속으로 빠져드는 봄날입니다.
 
이 봄날의 외로움과 무료함은 참 아득하고 또한 아늑하네요. 
 
그대는 이 연분홍 봄날을 어찌하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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