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정호승 시인님의 시를 읽으려고요. 서울 청계천 거리를 걸으며 배고픔을 생각하고 노동을 생각하고 생명을 생각하고 사랑을 생각한 전태일, 그리고 그의 자취를 쫓는 시인의 온기로 마음목욕을 하려합니다.
1. '고요히 함박눈이 되어 내린다'
오늘 제 블로그의 어느 댓글을 보니 지금 밖에 눈이 많이 온다고 합니다. 그곳은 서울인가요? 여기 눈 안 오는 부산에서 눈 오는 서울의 청계천 전태일거리를 생각해 봅니다. 지금 서울이라면, 빵모자를 눌러쓰고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전태일거리를 걸으며
- 정호승
청계천 전태일거리를 걸으며 기도한다
단 한번도 배고파본 적이 없는 내가
배부른 나를 위해 늘 기도하다가
단 한번이라도 남의 배고픔을 위해 기도한다
청계천 전태일거리를 걸으며 질문한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치며 살아왔는가를
단 한번이라도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적이 있는가를
침묵은 항상 말을 해야 한다고
침묵은 진리의 말을 할 수 있어야 침묵이라고
정의는 항상 어머니와 함께 있어야 사랑이라고
첫눈 오는 날
청계천 전태일거리의 버들다리를 건너며
누가 버린 신문 한장을 줍는다
서울역 염천교 다리 밑에서 신문 한장을 덮고
엄동설한의 잠을 자던
초승달처럼 웅크린 그의 꿈과 희망을 생각하며
청계천 전태일거리를 걷는다
별들이 땅에서 빛나고 함박눈이 땅에서 내린다
인간을 위해 목숨을 버린 인간의 불꽃이
고요히 함박눈이 되어 내린다
- 「내가 사랑하는 사람」(정호승 지음, 비채) 중에서
2. '남의 배고픔을 위해 기도한다'
눈 오는 전태일거리를 걸으며 시인은 자책하면서, 한편으로는 세상을 향해 우리 모두에게 말합니다. '단 한번도 배고파본 적이 없는 내가 / 배부른 나를 위해 늘 기도하다가 / 단 한번이라도 남의 배고픔을 위해' 기도한 적이 있느냐고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치며 살아왔는가를'.
마지막 5연에서 시인도 우리도 가슴이 차서 터질 것만 같습니다. '별들이 땅에서 빛나고 함박눈이 땅에서 내린다'고 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별들이나 함박눈 같이 반짝이고 아름다운 것들은 저 멀리 하늘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것들은 이 비루한 땅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요. 그러나 시인은 말합니다. 사람들아, 별들이나 함박눈이 땅에도 있다고, 그렇게 반짝이며 아름다운 사람이 땅에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을 스스로 불사른, 그 별... 함박눈... 이겠지요.
시인은 그렇게 '인간을 위해 목숨을 버린 인간의 불꽃이 / 고요히 함박눈이 되어 내린다'라고 시를 마무리합니다. 이 구절을 읽으니 뜨거운 불꽃과 차가운 함박눈이 부딪혀 마음 깊은 곳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나는 것만 같습니다.
3. 단지 '법을 지켜달라'고 자기 몸에 불을 지른 청년이 있었다
아침에 <한겨레>에 실린 소설가 김훈 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 글의 제목은 '중대재해법을 지켜라 - 노동자 죽음을 헛되이 말라'였는데, 차갑고 어두운 새벽 공기를 가르며 달려가는 다급한 응급차 소리 같았습니다. 김훈 님은 이 글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은 사망자가 1명 이상 발생한 사고를 '중대산업재해'로 규정하고 있다."라면서, "재계는 지금 이 '1명 이상'의 규정을 '2명 이상'으로 바꾸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1명 이상'을 '2명 이상'으로 바꾸어달라는 요구에는 노동자의 생명을 오로지 비용 항목의 숫자로 표시되는 사물로 인식하고 죽음을 물량화해서 회계 처리하는 인간관이 깔려 있다."라고 비판했습니다.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노동자의 누적 사망자수는 해마다 2,0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는 "지난해 산재 사망 사고 중에서 2인 이상의 사망 사고는 전체의 3%였다. 그래서 '2인 이상'만을 중대산업재해로 규정한다면 기업은 노동자 사망 사고의 97%에 대해서는 책임을 면탈하게 된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나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
이 두 문장이 뜨거운 불길에 사그라지며 외친 전태일 열사의 외마디입니다. 단지 '법을 지켜달라'고 자기 몸에 불를 질렀습니다. 전태일 열사, 그리고 그처럼 사라져 간 수많은 별들과 함박눈들의 소중한 희생을 우리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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