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원 작가님의 장편소설 '초의'를 읽습니다. 초의(草衣) 스님은 우리 전통 차문화의 기반을 닦은 분이죠. 이 책은 아주 공을 들여 우려낸, 깊은 향기를 가진 한 잔의 녹차와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이 책에서 녹차와 관련된 명장면 하나를 읽으며 마음목욕을 하려 합니다.
1. 3년 동안 취재하고 공부해서 엮은 책
이 책은 한승원 작가님이 초의스님의 행적을 찾아 3년 동안 발품을 들여 조사하고 공부해서 스님의 일대기를 소설로 구성한 것입니다.
작은 제목으로 '차, 사상, 예술을 선으로 승화시킨 선승'이라는 문장이 제목 아래에 달려있습니다. 초의스님(1786~1866)은 다성(茶聖)으로 불릴 정도로 차나무를 키우고 차를 덖고 차를 마시는 데까지 경지를 이루신 분입니다. 그가 교유했던 절친 추사 김정희를 비롯, 다산 정약용, 소치 허련 등을 보아도 초의스님은 조선후기 지성사의 한 축이었습니다.
그럼, 소설 속의 한 장면을 불러오겠습니다. 이 장면은 초의스님의 스승, 벽봉스님이 초의에게 차를 가르치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전자에 차를 넣고, 맥박이 뛰는 속도로 하나아 두울 세엣 ······이렇게 아홉을 세고 또다시 아홉을 헤아리면 애벌차가 우러난다. 그런데 그 첫 번째 아홉을 헤아렸을 때 뚜껑을 사알짝 열어봐라. 이때 차향이 스며 나오는데, 이 향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그윽하고 신비로운 향이다. 갓난아기를 따스한 물에 멱을 감긴 다음 살갗에 코를 댔을 때 나는 배냇향 같은 향은 우주를 생성시키는 은근하고 그윽한 기운이다."
- 「초의」(한승원 지음, 김영사) 중에서
2. 배냇향을 좋아하십니까?
녹차를 좋아하십니까? 그러면 저 구절을 만났을 때 공감의 무릎을 탁 치셨겠네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아침에 사무실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커다란 컵에 정수기의 뜨거운 물을 받는 일입니다. 그리고 조금 식힙니다. 컵을 두 손으로 감싸보고 컵의 뜨거움을 겨우 참을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그 속으로 찻잎을 우수수 떨어뜨립니다. 찻잎이 물속에서 스르르 몸을 풉니다. 잠시 후, 그러니까 소설 속의 저 문장대로라면, '맥박이 뛰는 속도로' 아홉을 세는 시간이 지나면, 새까맣던 찻잎이 지금 막 딴 찻잎처럼 파릇파릇해집니다.
처음에는 그러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코를 컵 속에 박는 일 말입니다. 그냥 찻잎이 몸을 푸는 움직임을 더 가까이 보려고 코를 박았던 건데요, 그때 이 신비로운 향을 만났던 겁니다. 소설 속의 문장처럼 '세상에서 가장 그윽하고 신비로운 향' 말입니다. '갓난아기를 따스한 물에 멱을 감긴 다음 살갗에 코를 댔을 때 나는 배냇향 같은 향' 말입니다.
그래서 계속 코를 박고 있습니다. 양손으로 컵을 움켜쥐고 말입니다. 이런 시간은 이른 시간이어서 아무도 없는 고요한 사무실입니다. 어머니 품속이라도 되는 것처럼 컵에 코를 쑤셔 박고 코를 흠흠거리는 자세는 결코 남에게 보일 성질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컵 속에서 콧바람을 불면 따뜻한 습기를 가득 머금은 그 향이 반사되어 얼굴 가득 번져옵니다. 몇 번이고 연이어 콧바람을 붑니다. 굳었던 얼굴이, 새까맣게 말라비틀어져 있던 몸과 마음이 촉촉하게 젖어 부드럽게 풀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2~3분가량 될까요? 참으로 편안한 시간입니다.
방금 벽봉 스님의 말씀을 이어 들어볼까요?
"차를 마시는 사람은 바로 이 향을 맡을 줄 알아야 한다. 이 향을 알지 못하는 것은 소리 못 듣는 귀머거리나 벙어리 하고 같고, 색깔을 볼 줄 모르는 장님하고 같다."
- 위의 같은 책 중에서
3. 저 순수하고 그윽한 배냇향처럼!
그런데 그 향을 알기만 한다고 되나요? 그다음에 이어진 아래의 말씀이 참으로 고마운 말씀 같습니다.
그 향을 알았다면 모름지기 이 향처럼 순수하고 그윽해져야 하고 세상을 똑 그와 같이 살아야 하는 법이다. 만일 물이 너무 뜨거웁거나 정도 이하로 차면 이 배릿한 향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 위의 같은 책 중에서
이 향처럼 순수하고 그윽해져야 하고 삶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네요. 만일 당신이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면 그런 멋진 향이 안 난다고 하네요.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말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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