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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나태주 시인 등단시 대숲 아래서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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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우리에게 소중한 삶의 자세를 알려주는 아름다운 시 '풀꽃'. 이 시를 쓰신 나태주 님의 등단시는 어떤 시일까요? 오늘은 나태주 시인님의 등단 작품으로 마음목욕을 함께 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1. 서울신문 신춘 당선작 '대숲 아래서'


나태주 시인님은 26세 때인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대숲 아래서'라는 제목의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분입니다. 우선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대숲 아래서

- 나태주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 네얼굴이 어리고
밤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소나기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가 가는 밤바란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제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것만은 아닌 가을
해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모두가 내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찌기 먹고
우물가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을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 「전후신춘문예당선시집·하」(조태일 김흥규 엮음, 실천문학사) 중에서


이 해 서울신문 신춘문예 본선 심사는 박목월 박남수 두 분이 하셨는데, 당선작 '대숲 아래서'에 대한 심사평을 잠시 읽겠습니다.

- 오늘날 현대시의 혼탁한 번역조 시풍의 풍미와 생경한 관념적 무잡성, 응결성이 약화된 장황한 장시의 유행 속에서 시류에 초연하여 잃어져 가는 서정의 회복을 꾀하고 시의 본도를 지켜 침착하게 자기의 세계를 신념하는 그(나태주)의 작품이 오늘날 우리 시단의 반성적인 계기가 되리라는 뜻에서 과감하게 당선작으로 밀어본다.

2. 실연을 극복하려고 쓴 시


나태주 시인님의 등단작 '대숲 아래서'는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그는 어느 해 부산의 한 강연에서 '대숲 아래서'를 소개하면서 "그 당시 어떤 여인에게 차여서 이를 극복하려고 시를 썼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강연 당시 70세를 훌쩍 넘긴 그는 특유의 충청도 억양으로 "젊은 시절 꼭 되어야 하는 일이었는데 꼭 안 되어 버렸잖아요."라고 말했는데, 청춘시절의 실연이 정말 어제 그제 일어난 일이라도 되는 듯, 그의 말에서 진한 안타까움이 느껴졌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다시 '대숲 아래서'를 읽으니 시가 금방 가슴으로 들어옵니다.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어제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라고 하는군요. (저는 일찍 돌아가신 어머님이 이렇게 그립고 그립답니다.) 그래서 '자고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이 붙어있고,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가 바람에 휩쓸려 대숲처럼 흔들리며 실연의 아픔을 건너고 있는 청춘의 막막한 마음을 투영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아득한 가을날에는 '동구 밖에 떠드는 아이들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립니다. 그런 시인은 멀리서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라면서 자신의 쓸쓸함을 노래하는군요.

그런 아픔을 견디려는 듯 시인은 이 시를 마무리하면서 무언가 실낱 같은 희망을 노래해 봅니다. 우물에 빠져 '머리칼을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라고 합니다. 그 달님처럼 머리칼을 헹구고 그녀도 그에게로 오게 될 것만 같습니다. 아니, 이 어긋난 비현실을 헹구고 자신에게로 오라고 그녀에게 재촉하는 것만 같습니다. 이런 몸짓이라도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아플까요?

어제는보고싶다편지쓰고어젯밤꿈에너를만나쓰러져울었다나태주시대숲아래서중에서
어제는 보고싶다 편지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 나태주 시 대숲 아래서 중에서

 


3. 두근거리면서 아름다운 마음으로 쓴 시

나태주 님은 그 강연에서 "한 여자에게 러브레터를 쓰듯 쓴 시가 '대숲 아래서'였다."라면서, "두근거리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착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마음으로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26세의 청년 나태주는 그때 실연의 아픔을 잘 견뎌냈을 것만 같습니다. '대숲 아래서'는 그렇게 시인 자신을 달래고 이렇게 대숲처럼 흔들리는 우리의 쓸쓸한 마음도 어루만져주는 시가 되었습니다.

글 읽고 마음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나태주 시인님의 시를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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