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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정호승 시 고래를 위하여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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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호승 시인님의 시 '고래를 위하여'를 만납니다. 푸른 바다를 천천히 유영하는 한 마리의 고래처럼 우리 함께 이 시 속에서 천천히 헤엄치면서 독서목욕을 해보십시다.

1. 정호승 시 '고래를 위하여' 읽기


고래를 위하여

- 정호승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으면
푸른 바다가 아니지
마음속에 푸른 바다의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지

푸른 바다가 고래를 위하여
푸르다는 걸 아직 모르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모르지

고래도 가끔 수평선 위로 치솟아올라
별을 바다본다
나도 가끔 내 마음속의 고래를 위하여
밤하늘 별들을 바라본다

- 정호승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비채) 중에서


어느 대학의 입학부서 현관에 걸린 이 시를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 시의 첫 번째 연이 적혀 있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는 청년들에게 하는 말이겠지요. 대학은 청년들에게 푸른 바다의 고래 같은 꿈, 그런 꿈을 키워주겠다는 말을 이 시를 통해서 전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를 읽다 보면 가슴에 파도처럼 일어나는 어떤 꿈틀거림을 느끼게 됩니다. 고래는 왜 우리에게 꿈틀거림을 전해줄까요? 고래를 생각하면 왜 자꾸 몸이 붕 뜨는 것처럼 출렁이고 마음이 한없이 넓어지는 느낌이 들까요?

2. 고래의 시간은 어떤 시간일까요?


이 시의 열쇳말이 '고래'이니까, 우리가 고래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 이 시는 우리의 마음을 더 힘차게 출렁이게 할 것입니다.

The Cobuild 영영사전은 'whale'이라는 단어를 설명하면서 아주 흥미로운 문장 하나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 If you say that someone is having a whale of a time, you mean that they are enjoying themselves very much.

이 문장은, 누군가가 'a whale of a time을 가지고 있는 중'이라는 의미는, 그들은 아주 즐거운 시간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a whale of a time'이 구조를 보십시오. 그 뜻이 애매합니다. '시간의 고래'? '고래의 시간'도 아니고 '시간의 고래'라니. 우리는 어떤 미로에 빠진 것만 같습니다. 특히 즐거운 시간을 표현하는데 왜 고래가 등장해야만(!) 했을까요? 그것도 아주 즐거운 시간이라는 표현에 말입니다. 이것이 이 구문에 담긴 비밀을 푸는 실마리인 것 같습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십시다. 이 구문에는 특정한 것을 지칭하는 'the'라는 정관사가 아니라, 불특정한 것 앞에 붙는 'a'라는 부정관사가 붙어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해석이 가능할까요? '어떤 시간의 어떤 고래'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겠네요. 이는 '아무 시간대의 아무 고래'라는 의미로 확장됩니다. '아무 아무 시간대의 아무 아무 고래'가 왜 굉장히 즐거운 시간(great time)을 의미할까요?

맞습니다. 고래는 바다의 최상위 포식자입니다. 바다에서는 두려울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든지 자유입니다. 아무 때나 어떤 고래도 자유입니다. 바다의 생태계에서 고래에게는 참으로 편안한 시간이겠습니다. 그런 시간이야말로 최상의 시간이겠네요. 그래서 'a whale of a time=great time'이 되겠네요.

정호승시고래를위하여중에서
정호승 시 '고래를 위하여' 중에서

 

 

3. 가슴에 고래 한 마리 키우고 있습니까?


자, 정호승 시인님의 시 '고래를 위하여'로 돌아가봅시다.

- 마음속에 푸른 바다의 /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 청년이 아니지

우리가 고래의 자유에 대해 알고 나니, 이 구절의 말맛이 더욱 팽창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청년이니까 가질 수 있는, 지향해야할 가치, 자유입니다. 기성세대가 고정관념이나 관습에 얽매인 사람들이라면 청년은 자유로운 세대입니다. 그러니까 청년에게 자유가 없다면 청년이 아니겠네요.

푸른 바다의 고래처럼, 자유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입니다. 불의를 두려워하지 않고 억압을 두려워하지 않고 알지 못함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청년이 그런 것을 두려워한다면 미지(未知)의 세계에 발을 디딜 수 없을 것입니다.

청년에게만 자유가 중요할까요? 우리 모두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떤 것에 너무 많이 욕망하고 집착한다면 그것을 가지지 못할까, 가진 것을 잃게 될까 두려움을 느끼겠지요? 그렇다면 고래처럼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고래로부터 배우게 됩니다. 바랄 게 없어서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자유라는 것을요.

글을 읽으며 마음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정호승 시인님의 시를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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